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란 처지(處地)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말로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입장의 동일화가 가장 큰 연대의 정신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교육의 기본 테제라고 생각한다.
"삼국지연의"에는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죽자 그 뒤를 잇기 위해 형제들끼리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지는 대목이 있다. 양수와 순욱의
조력을 받는 조식과 가후의 조력을 받는 조비의 권력싸움은 권력 앞에 부모자식도, 형제도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결국 형제간의 권력쟁탈전에서 승리한 조비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조식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되(그것이 동생을 살리려고
한 것인지, 죽이려는데 명분이 부족하여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형제'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를 짓되,
형제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숙제를 내어 동생 조식을 생사를 건 시험에 들게 한다.
그때 쓰인 것이 조식의 유명한 '칠보시'이다.
煮豆燃豆箕(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上煎何太急(상전하태급)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네.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가
지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입장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용자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노동자인 것이다. 그런 생각이라면 마치 조식의 칠보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자식들인 셈이다. 그런데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가" 아마 그 밑바탕엔 나만은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있을 게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듯 사회 전체적으로 고객감동서비스에 대한 강박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어딘가에 화풀이를 하고 싶어지고, 이것이
악순환이 되어 '서로 들볶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그렇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내의 다른 체제에서도 자원의 분배와 소비의 문제에 있어 '시장'의 가치를 절대로 낮게 보지 않는다. 시장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해왔던 매우 합리적인 분배의 도구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장에서의 합리주의로만 존재할 때 인간의 관계에서 '염치'는
사라지고 '얌체'만 남는 건 아닐까.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사회성의 기본 중 기본이다. 언젠가 나는 마음속에 '남(타인)'을 품지 못하면 결국에 '나'도 품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자연(영성)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탓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또는 어떤 생명체의 희생을 통해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원죄이며 업보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어미의 자궁에서 만나는 순간부터 생명체는 모체의 영양분을 탈취하는 존재이고, 이후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다른 생명체를 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언제나 배가 고팠던 원시의 인류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가깝게 느꼈던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명을 취한 뒤에는 동굴이나 바위 벽면에 자신들이 취한 생명을 그려넣어 이들의 목숨이 다른 어딘가에서는 지속되길 기원했다.
이것을 악어의 눈물이나 위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어찌되었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선 농부가 이런 생명의 존엄에 대해 가장
가깝게 느끼는 이들이다. 현대의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음식이란 공장에서 나오는 산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음식을 적나라한
다른 생명체의 목숨으로 느끼는 이들은 아기들뿐이다.
아이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생선을 보고도 종종 먹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생선이 눈을 뜨고 있으며 온전히 생선 모양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때가 많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그 스스로도 비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두려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그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은 인간을 인간으로 키우지 못하는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