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避諱)와 역린(逆鱗)
피휘(避諱)와 역린(逆鱗)
다소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김종인이 새누리당을 탈당한다는 소식이 저간의 화제인데 - 다른 한 편으론 이야말로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종인의 존재감이 사라진지가 언젠데, 경제민주화가 사라진지 언젠데 새삼스레 이걸 가지고 뉴스가 되고 그래 - 그래서
약간 다른 의미에서 아젠다로서 그나마 유의미했던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마당에 박근혜 정부에 남은 유일한 아젠다는
'창조경제'뿐이란 생각이다(물론, 대선개입이란 블랙홀이 이 모든 걸 삼킬 게다).
조선왕조 500년,
'태정태세문단세'를 달달 외워도 우리는 조선 임금들의 시호는 알아도 그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기껏해야 아는 이름은 드라마
'이산' 덕분에 정조 임금의 이름이 '이산'이란 정도다. 나중에 "뿌리깊은 나무" 덕분에 세종의 이름이 '이도'였다는 정도를
추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 임금의 이름은 전부 외자일까.
그것은 조선왕조가 사대부와 분권 형태의
권력(봉건)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어쨌든 '전제왕조'였던 탓에 왕실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의 이름에 대해 엄격한 규율 - 임금의
이름은 아무도 부를 수 없으며 또한 일반 공문서나 사문서에서도 사용할 수 없었다 - '피휘(避諱)'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왕실 임금의 이름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의 형태였다면 당연히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건너뛰기 위해 피땀 흘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게다. 이런 형태의 피휘가 없었던 서양의 왕실 이름은 길다. 그것도 아주
길다. 그에 비해 조선왕실의 임금 이름이 짧고, 일반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 이름을 택했던 까닭은 왕실의 존엄은 유지하되 일반
백성의 불편은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했는데, 세계 역사상 이처럼 오래 유지된 왕조는 드물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도리어 안타까울 지경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만큼 당시 조선의 시스템이 잘 짜여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권력의 속성상 어떤 권력이든 피휘와 역린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는 이 피휘와 역린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래서 이 정부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다.
창조란 경계에 도전하는 일이다. 경계는 아무나 넘어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영화 "월드워 Z"의 좀비들이 이스라엘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무수히 많은 좀비들이 몸을 던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두려움 없이
장벽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피휘(금지)와 역린(처벌)의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회에서는 어떤 창조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권의 존립 자체도 위험해진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