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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지상에서의 며칠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사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 사람들은 누구나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슬픔.. 더보기
이병률 -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그(녀)에게 갔던, 그(녀)에게 향했던 무수한 발 걸음, 말없이 되돌아 서야 했던, 거절당했던 막다른 벽에 버티고 서서 간신히 삶을 추어올리고 되돌아서야 했던 그리하여 말도 못하고 '음' 한 마디로 되돌아서야 했던 .. 더보기
고정희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뚝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 쪽 뚝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 문득 인생이 허망하다.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라고 시인이 적어놓은 싯귀를 그대로 옮겨 적으며 이것이 내게 하는 말 같다. 나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힘주.. 더보기
백무산 -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 백무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 더보기
조은 - 섬 섬 - 조은 물이 나를 가둔다 물이 나를 조인다 새들은 내 몸에다 배설을 하고 바람은 커다란 독처럼 나를 묻는다 ……… 가자 이 햇빛 좋고 바람 서늘한 날에 나를 기어오르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꺾으며 홀가분해지며 출처 : 조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문학과지성사, 1996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은 하이쿠를 연상케 하는 두 줄의 짧은 시 "섬"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했는데 조은 시인의 동명의 '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지 않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 온전히 '관념의 섬'으로 '환유(metonymy)'를 이용해 의미망을 확대한다면 조은 시인의 '섬'은 묘사를 통해 우리들을 섬으로 초대한다. 물로 사방이 막혀서 섬이다. 물은 길이지만 동시에 나를.. 더보기
유안진 - 술친구 찾지 마라 술친구 찾지 마라 - 유안진 아무리 마음 맞는 여럿이 얼크러져 설크러져 마셔봐도 결국에는 저 혼자서 마시는 것이 되고 저마다 제각기 제 상처만 찾아가는 외로운 술자리 멱살 잡을 원수도 목을 안고 같이 울 그이도 결국에는 외동그래 저 하나일 뿐 가엾는 제 몸 밖에 누가 또 있다던가. * 술 마시고 내게 신세 타령하다가 벼락 맞은 친구들이 꽤 많다. 평소 맨정신으로는 조곤조곤 이야기도 잘 들어준다는데 누군가 술 마시고 내게 신세 한탄 늘어놓으면 그걸 참아주지 못하고 버럭 성질부터 부린다. 그네들 알콜 기운을 빌려 평소 고이고이 들어주던 내 스트레스를 걔네들에게 푸는 걸지도 모른다. 이봐, 이봐! 술 마신 놈! 내가 승질 부린 거 기억 안 나지? 하고 말이다. 흐흐 더보기
전기철 - 사격클럽 안내책자 한 귀퉁이에서 안락사한 물고기 사격클럽 안내책자 한 귀퉁이에서 안락사한 물고기 - 전기철 낯선 남자의 아이를 낙태한 후 동네 건달들이 수없이 건드려도 아이를 갖지 못한 누이는 물고기를 키웠다. 남태평양 어디쯤에서 왔다는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를 키우는 누이 먹이를 줄 때마다 귀향을 약속하며 장난감 배를 띄웠다. 지푸라기와 헝겊과 연필로 만든 작은 배 사격클럽에 응모하지만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 우울증에 시달리는 누이 어머니가 키우는 고양이만 보면 언젠가는 안락사를 시키겠다고 장담하면서 킬러가 되고 싶어하는 누이 놀이공원에서조차 총을 쏴본 적도 심지어는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탕, 탕, 탕, 실눈을 뜨고서 손가락 총을 쏘는 누이는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제 안에 바다가 있어 늘 썩은 생선 냄새가 나는 누이는 바다를 .. 더보기
이외수 -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 이외수 살아 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 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시(詩)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될 때 한 번씩 걸리는 작가와 시인들이 있다. 이른바 순수문학, 평단에서 주목하고,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는 작가와 시인이 있는가 하면 평단에선 거의 주목하지 않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와 시인, 작품들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 꽤 유명한 작가 중에 한 분이 문예창작과의 존재가 문학에 .. 더보기
임화 - 자고 새면: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자고 새면 -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임화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죽음에서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 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클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리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리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 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 미래사, 1991. * - 한국에는 미남 시인의 계보가 있다하는데, 언어를 표현의 매개로 사용하는 시인에게 얼굴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더보기
최승자 - 자화상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출처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 최승자의 시에서 발견되는 - 이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