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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김수영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 더보기
고정희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뚝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 쪽 뚝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 문득 인생이 허망하다.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라고 시인이 적어놓은 싯귀를 그대로 옮겨 적으며 이것이 내게 하는 말 같다. 나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힘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