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문학

박목월 - 이별가 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나는 지금도 제일 처연한 시 중 하나로 신라 향가인 를 손꼽는데, 박목월 선생의 이 시 역시 못지 않다.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하는데 와락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은 걸어서도 건.. 더보기
박영근 - 길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 더보기
오규원 - 모습 모습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인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육체는 명동 골목 사이로 쏴아하고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가늘게 흔들렸으므로...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을... ** 교수가 되기 전에 시인이란 생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직업으로 오랫동안 편집자로 .. 더보기
이성부 - 슬픔에게 슬픔에게 - 이성부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 오래전 어느 시절 나는 내 삶에도 노래처럼 어떤 음계가 있다면 그것은 국악 장단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흘러간다는 진양조 장단에 발맞춘 슬픔이 아닐까 결론짓고 홀로 힘없이 미소지은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호흡과 리듬을 타고 난다면 나는 아마도 진양조 늦은 장단에 내 삶을 맞추고 싶었다. 내 삶은 언제나 손아귀에 가득 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새어나가버리.. 더보기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승려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인연(因緣)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태어남과 .. 더보기
윤제림 - 길 길 -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 더보기
백석 - 여승(女僧) 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말이 담고 있는 정경이 구구절절하게 아프고, 아프다. 머리 깎은 여승이 속세에서 겪은 삶의 내력이 한 편의 짧은 시에 모두 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삶의 이러한 면, 저러한 면을 사려 깊게 살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보여주는 몇.. 더보기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 더보기
김시습(金時習) - 사청사우(乍晴乍雨) 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 더보기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