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 때에 | 레이먼드 브릭스 지음 |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1999)
이 책의 저자 이름을 보고 이 책이 그의 다른 책들 가령 "스노우맨, 산타할아버지의 휴가, 곰" 등을 연상하는 분들은 레이먼드 브릭스(Raymond Briggs)를 잘 아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약간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작품들이 일종의 해피엔딩에 아동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 책은 아동들이 읽기 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혹은 만화를 이용한 일종의 반핵계몽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17초. 핵폭탄이 투하되자 폭격기 승무원들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특수방안경을 착용했고,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은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완수했다. 승무원들은 진홍색의 섬광을 보았다. 원자탄은 십만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섭씨 300,000도에 이르는 불기둥을 뿜어냈고, 1초 후 불기둥은 반경 250m로 부풀어올랐다. 버섯구름은 7km 상공까지 솟아올랐고, 폭발로 인한 열반응은 16km 상공까지 미쳤다.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폭발 즉시 그리고 며칠동안 대략 14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3일 후 나가사키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7만 명이 죽었다. 그후 5년간 방사능에 피폭된 13만 명이 더 죽었고, 그 외 수십만 명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불구가 되었고, 자식들에게까지 유전되는 질병을 얻었다. 전쟁은 끝났다. 미/영/소를 비롯한 연합국 49개국과 독/이/일 등 추축국 8개국이 참전하여 1조 6,000억의 재산 손실과 2,700만의 전사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이 폭발하는 장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세계대전을 경험한 인류는 과연 반성했을까? 아니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 이 만화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70년 레이몬드 브릭스가 살아왔던 20세기의 전반기에 경험한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내면서 더 이상의 세계대전은, 더 이상 전쟁은 있을 수 없다고 낙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인류에게 지불하도록 만든 피의 교훈이, 핵의 공포가 인류를 공멸시킬 수도 있는 전쟁을 억제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이런 낙관적인 기대는 오래지 않아 착각이었음이 밝혀진다.
파멸의 시한폭탄인 핵은 그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베트남전 당시엔 전술 핵폭탄의 사용이 진지하게 고려된 바 있었고, 그외 국지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진지하게 혹은 너무 경솔하게 사용을 검토해온 무기였다. 많은 이들이 핵전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이미 핵무기와 상당히 친숙하다는 것을 잘 모른다. 미국은 이미 여러 전쟁에서 특히 걸프전을 통해 '열화우라늄탄'이라는 핵무기를 사용해 왔고, 그 결과 전장으로 변한 지역의 일반인들은 물론 참전한 병사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열화우라늄탄"의 방사능에 피폭되어 병이 나고 있다. 이름하여 '걸프증후군'이 바로 그것이다.
- <바람이 불 때에>의 주인공 부부는 정부의 핵방어 지침을 충실히 따라 주택의 외부 유리창에 흰 페인트를 칠하고, 집 안에 나무판자를 이용해 핵대피소를 만든다(이건 당시에 실재했던 정부의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레이몬드 브릭스가 그리고 있는 "바람이 불 때에"는 바로 그런 지점, 인간이 핵에 의한 공포 속에 놓여 있던 시점에 그려진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동서양진영 간의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기까지 동서냉전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개발하고, 1959년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인 중소 관계가 악화되고 베를린에는 장벽이 설치되고, 1962년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이 무렵 유럽에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한다면 미국의 핵무기들이 배치되기 시작한다. 1965년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북폭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굳이 유럽이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핵전쟁의 위험은 커져만 갔다.
이 작품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바로 그 무렵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 무렵은 아직 핵무기의 공포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와 이렌느 퀴리가 우라늄을 다루면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사선의 위험을 미처 알지 못해 두 사람 모두 암으로 사망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인 존 웨인은 영화 1954년, 서부영화의 전성기를 누리고있던 존 웨인은 MGM 영화사로부터 "징기스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는가"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를 찍기로 되어있던 미국 애리조나의 피닉스 외곽 120km 사막지대는 1952년까지 핵실험이 있었던 방사능 오염 지역이었다. 방사능의 위험을 잘 몰랐던 제작자는 정부에서 허락한 문제의 지역에서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이때 영화 <정복자>에 출연하거나 종사했던 스태프 117명과 수백 여명의 엑스트라 중 95%가 암으로 5년 안에 사망했다. 그중에는 존 웨인과 함께 출연한 감독 딕 포웰, 수잔 헤이워드, 아그네스 무어헤드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와 정부는 적의 핵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이쪽도 핵무장을 추진하고, 상대방의 핵무장에 보복하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핵무장을 준비한다. 미국이 1940년부터 1995년까지 핵전쟁 준비를 위해 투입한 돈은 대략 3조 5천억 달러로 추정된다. 1995년 이후 계속되었던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도 미국은 매년 270억 달러를 군비에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핵전쟁 방지를 위해 투입한 돈은 22억 달러에 불과하다. 군비를 위해 투입한 돈의 10분지 1도 안 되는 금액이며, 그렇게 쓰인 돈 역시 자신들의
핵전쟁 회피 노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국의 핵전력을 제한하기 위해 쓰인 돈이다. 그런 중에 자국의 국민들에게까지 핵전쟁에 대비해 안전한 대피책이라고 알려준 것이 바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이 책에 나오는 대피법이었다.
레이몬드 브릭스는 바로 그런 정부 정책의 허구성과 핵전쟁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 만화를 그렸다.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잡지는 핵의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핵공격 당시 피폭된 한 시민에게 필요한 의약품의 총량을 계산한 바가 있는데(그렇다고 이 환자가 치유되어 살아남는다는 뜻은 아니다.) 산소통 42개, 붕대43.2km, 혈액 36리터, 체액 47.1 리터, 간호사 3명, 몰핀, 페니실린 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어느 병원도 단 한 사람의 피폭자를 살릴 수 있을 만큼의 의약품을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즉, 핵폭발이 일어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레이몬드 브릭스는 평소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즐겨 그려왔던 인물인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차라리 냉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리얼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느꼈던 핵의 공포가 그만큼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 무언가 결론을 짓기는 참 쉽다. 이젠 핵의 공포가 사라졌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동서냉전의 시대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되물어야 한다. 이 미친 시대, 12명의 사우디 인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을 공격하자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안전한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중에서 실제로 동서냉전의 원인처럼 보였던 이념이 실제 전쟁의 동인이었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의 실제 원인은 늘 전쟁으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아왔고, 그들의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는 동안 전쟁은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처럼,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과 확실한 건 한 가지다. 우리들 중 누구도 살아서 별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참고로 이 책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그 작가는 레이몬드 브릭스가 아니다. 그가 감수를 하긴 했지만 실제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란 작가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추천하고픈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이언자이언트"다. "아이언 자이언트"의 원작자는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다. 한 번 꼭 같이 살펴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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