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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어린이/청소년

피터의 의자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1996)

피터의 의자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에즈라 잭 키츠가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앞서 "내친구 루이"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폴란드 그리고 유대인, 이민자... 라는 이 세 단어는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폴란드계 유대인하면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엔 이런 대목이 있다.

 

로자로 하여금 삶을 지탱하도록 해준 것, 시련을 견뎌나가게 해주고, 정면으로 맞서며, 추락할 때마다 다시 튀어오르게 해준 것, 불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게 해준 것은 유머였다. 아마 그건 자신도 모르게 폴란드계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부여한 타고난 유머감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푸른숲, 382쪽>

 

1492년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정치적 통일)를 완수한 뒤, 스페인 지역 내의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를 실시했고, 이때 스페인의 유태인들가운데 대략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에는 약 330만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대박해인 "포그롬(pogrom)"이 행해졌는데, 이 무렵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은 폴란드였다. 러시아에서 포그롬이 행해질 무렵 중동부 유럽엔 대략 65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홀로코스트가 일어나던 1939년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은 85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폴란드는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시대(1807-1815)'를 제외하고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폴란드의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 에즈라 잭 키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막스 갈로의 표현을 빌어 한 단어를 더 추가해야겠다.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작가. 에즈라 잭 키츠라고 말이다.

 

그의 작품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기 보다 서민적인 일상의 주인공들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한 번 등장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 속 어딘가에서는 주인공 혹은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즈라 잭 키츠가 어떤 사람도 주변부화되는 것, 소외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즈라 잭 키츠의 "피터의 의자"에서 주인공 피터는 평범한 흑인 서민 가정의 어린이다. 그는 "내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목적은 실재에서 환상까지 나의 모든 경험을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구든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느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한다. 피터에게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어린 피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터에게 동생이 생겼다. 피터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야기의 첫 장면은 어린 피터가 혼자, 아니 혼자는 아니다. 화면 우측 하단에 쭈그려 앉아서 피터가 놀고 있는 장면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아마도 닥스훈트가 아닐까 싶은데) 윌리가 있다. 피터는 나무토막과 기타등등의 잡동사니를 이용해 이제 막 빌딩 한 채를 완성하려는 찰나다. 그때 윌리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바람에 피터가 공들여 쌓은 빌딩이 무너지고 말았다.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가 깰지 모르니 조용히 놀라는 말이다. 다음 장면에서 피터와 윌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 이 장면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에즈라 잭 키츠 특유의 콜라쥬 기법이 응용된 화면에서 마치 동화 바닥을 벽삼고, 문삼아 만화처럼 피터와 윌리가 목만 내밀고 있다.(동생 수지의 방 안을 들여다 본다. 수지? 수지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맞았다. 에즈라 잭 키츠의 "내친구 루이"에서 로베르토와 함께 어린 루이에게 인형극을 보여주던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 또한 수지이다. 이 책 "피터의 의자"가 1967년작이고, 루이가 1975년작이니 그 기간 동안 어린 수지가 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피터는 자신의 물건을 동생을 위해 분홍색으로 스스로 칠하면서 박탈과 소외의 슬픔을 벗어나 나눔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깨달아 간다.

 

어찌되었든 에즈라 잭 키츠는 그림동화작가로서 일러스트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역시 대단하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이는데, 첫번째 에피소드와 연계된 바로 다음 대목에서 이야기 전체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잘 암시해주고 있다. 피터가 사용하던 요람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는 피터의 여동생 수지였던 거다. 작가는 어린 피터의 생각 "저건 내 요람인데, 분홍색으로 칠해버렸잖아."를 통해 피터의 박탈감과 그것이 현실 상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피터의 의자, 즉 파란색 의자가 어떻게 피터의 손에 의해 분홍색으로 덧칠되는가 하는 과정을 통해 잘 녹아든다. 피터는 자신의 요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술 더 떠 피터가 앉았던 식탁 의자까지 분홍색으로 덧칠하려고 한다. 그것도 피터의 손까지 빌어서 말이다. 게다가 피터의 침대 마저 분홍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어린 피터에겐 이 과정이 마치 분홍색의 침공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어린이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느끼게 되는 박탈감과 이를 치유하고, 스스로 성장한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과정을 에즈라 잭 키츠는 색의 변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제 피터에게 남은 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 하나뿐이다. 피터는 의자와 강아지 윌리를 데리고 가출을 시도한다. 그동안 피터에게 더할나위없이 소중하고 아늑했던 공간인 가정에서 분홍색(여동생 수지)은 점점 피터의 자리를 점령해들어오고, 피터는 하나 남은 자기 의자를 가지고 탈출하는 것이다. 자기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피터의 모습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마치 5.16군사쿠데타 이후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는 박정희 처럼 양 손을 허리께에 짚고는 의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 비장하기 이를 데 없어 웃음이 절로 나는 것이다. 게다가 피터가 집을 나올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은 더욱 커진다. 사진 속의 아기 피터조차 작은 의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에즈라 잭 키츠는 사진 속의 피터를 그려내곤 혼자 씽긋 웃지 않았을까.

 

분홍색의 침공으로부터 탈출한 피터는 많은 일을 했으므로 이제 피터는 조금 피곤하다. 피터의 옷과 신발도 모두 의자와 같은 청색 계열로 묘사되고 있는데 의자에 앉으려던 피터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이 장면을 마치 영화 속의 줌인처럼 화면 속의 인물들을 좀더 크게 그려내고 있는데, 사진 속의 아기 피터와 피터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되고 있음에 이 작가의 섬세함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작가는 피터가 벌이는 잠시의 일탈, 아니 일탈이라기 보다는 동생이 생긴 어린이의 반항을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엄마가 창가로 와서 피터를 불렀어.
"피터야,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래?
점심에 아주 맛있는 걸 해 먹을 건데."
피터와 윌리는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 했어.
피터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었거든. <본문 중에서>

 

엄마의 부름에 딴청 부리는 피터, 이때는 사진 액자에 담긴 아기 피터도 딴청을 부리는 듯 보이고, 피터가 들고 나온 악어 인형도, 개구진 애완견 윌리도 피터와 반대 방향을 쳐다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누구라도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깨닫긴 하지만 겸연쩍은 탓에 이를 인정해보지 못한 경험이 있을 거다. 그 순간의 한 장면을 카메라로 찰칵 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피터는 엄마 몰래 커튼 뒤에 숨어서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도록 한다. 물론 커튼 아래로 피터의 파란 신발이 보인다. 엄마가 커튼을 훽 젖히자, 피터는 옆에 숨어 있다가 폴짝 뛰어나와 소리친다. "나 여기 있어요."

 

엄마가 피터를 못 찾은 건지, 일부러 못 찾은 척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피터의 엄마는 피터 자신이 스스로 성장했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피터의 명분을 세워주었고, 피터 역시 이런 사려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답게 스스로 자신의 의자를 분홍색으로 칠해 동생 수지에게 선물할 계획을 말한다. 박탈이 증여로 바뀌는 순간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어린 피터의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작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지도 모르겠다. 우린 누구나 알게 모르게 남의 몫을 조금씩 얻어쓰고, 나눠쓴 덕으로 오늘까지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분홍색(동생)을 침탈로 여겼다면 이젠 함께 하는 연대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