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보리스 - 윌리엄 스타이그 | 우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아모스와 보리스"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톰과 제리" 같은 우리 부부가 떠올랐다. 톰은 고양이고, 제리는 생쥐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그렇게 단순한 고양이와 생쥐 사이가 아니다. 비록 톰은 고양이지만, 영리한 생쥐인 제리에게 늘상 골탕을 먹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한나와 조셉 바바라 콤비는 그들 자체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에 통칭 "한나 바바라(Hannah Barberra)"라고 불린다. 한나 바바라 시리즈 중 하나인 "톰과 제리"를 내 동생은 넋을 놓고 보았었다. 입에 밥 숟가락 넣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빼놓고 보았기에 종종 야단을 맞곤 했는데, 어렸을 때는 나 역시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 이 시리즈를 다시 보면 어렸을 적엔 왜그리 넋을 빼놓고 웃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배경과 소재만 약간씩 변화를 줄 뿐 판에 박힌 듯 빤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못되고, 음흉하지만 늘 골탕만 먹는 고양이 톰과 작고 힘없지만 영리해서 늘 승자가 되는 생쥐 제리 사이의 슬랩 스틱풍 액션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리에겐 늘 사납지만 우둔한 불독 부자가 있어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해준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그런 역전과 반전의 미학에 있다. 현실 세계에선 당연히 강자인 고양이와 생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고, 음흉한 계획을 세운 톰의 흉계가 결국 톰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판에 박힌 이야기뿐이었다면 "톰과 제리"가 그렇게 인기있는 만화 시리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 바바라 콤비는 종종 대중의 이런 반응을 알아채고, 톰에게 실컷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언제나 착하기만 한 제리가 아니라 종종 음흉해지는 제리가 있고, 그런 제리는 벌을 받는다. 혹은 톰과 제리가 합작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한다. 톰과 제리는 할리우드 고전 코미디 영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슬랩 스틱과 스크루볼(톰과 제리의 우정은 종종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코미디를 만화로 절묘하게 옮겨온 것이 성공의 배경이다.
아모스는 생쥐다. 그러나 제리 같은 생쥐는 아니다. 아모스는 제리보다 진지하고, 무엇보다 바다를 사랑하는 생쥐다. 아모스는 뭍에서 태어나 뭍에서 살았지만 바다를 동경했고, 어느날 우연히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곤경에 처하고 만다. 뭍에서 태어난 뭍에서 자란 생쥐, 아모스의 이야기는 마치 부모의 품을 갓 떠나 좀더좀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사회로 점점더 넓고 각박한 세상으로 나간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언젠간 자식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어린이들에게 이별의 의미, 우정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랑도...
종종 우리네 어린이문학 책들을 읽다보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은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에서 우리 아동문학엔 "쿠오레주의"에 비해 "피노키오주의"가 부족하단 말을 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문학에는 해방과 교화의 기능이 있다. 해방이라 함은 거칠게 말해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교화란 일종의 간접체험(교육)을 의미하는 말인데, 우리 어린이문학이 많이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동문학에서 "피노키오주의"는 여전히 결핍상태이다. 혹여라도 그런 판타지를 다룬 아동문학작품들도 뭔가 사유의 뿌리가 없이 수경재배된 식물성 이미지를 지닌다. 식물성 느낌을 주는 건 교화를 주어야한다는 강박과 현실에 뿌리박은 동화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가 결합되어 생긴 가장 안좋은 경우를 의미한다. 톰과 제리,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일종의 우화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 ("톰과 제리"의 경우엔 약간의 이견이 있겠지만 긍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해 말하자면 재미라는 측면에서 다소 비교육적일 수 있는 요소들 혹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 낯선 판타지의 세계는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이야기는 매우 낯익다. 힘은 없지만 항해를 꿈꾼 생쥐 아모스는 겁도 없이 바다로 나간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넓디넓은 바다를 떠다니게 된다. 그런 아모스를 구한 것은 바다에서 아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 보리스이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없을 것 같은 보리스도 어느날 바다로부터 밀려나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런 보리스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구 코끼리들을 불러 보리스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것이 이 야기의 전체적인 얼개이다. 낯설기는 커녕 너무 낯익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는지 도리어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다.
기실 아동문학시장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질좋은 창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저런 전래 동화 혹은 국적 불명의 세계 민속 동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위인전들이 난립해 있다. 게다가 워낙 소문에 눈 어둡고, 귀 얇은 유행이다 보니 한 번 입소문을 타고 번진 아동도서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모모 출판사는 원래 한 번도 아동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 적이 없음에도 흥행 대박의 결과로 빌딩을 올리네, 원작자와 저작권료 지급 문제로 송사에 걸리더니 원래의 기획을 살려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 출판하면서 중국에 진출한다고 한다. 저작권협약이 본격적으로 발효되면서 괜찮은 작가들의 작품을 서로 판형만 달리해서 중복 출간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에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작품들이나 애초부터 저작권을 따지기 어려운 전래 동화류들이 난립한다.
그런 중에 이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는 낯익은 이야기를 어떻게 낯설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받고 은혜갚는 동물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소재이고,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류의 교훈을 다룬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아모스와 보리스"를 변별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모스의 진지함이다. "아모스와 보리스"의 두 주인공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본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이 둘의 결말은 "그리하여 아모스와 보리스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더래요"가 아니다. 이 둘의 우정은 서로의 목숨을 구할 만큼 진한 것이지만, 정작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바다와 육지라는 두 존재가 누리는 삶의 토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둘의 결말이 이별이란 점에서 이 둘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접하게 되는 가장 강렬한 이별은 무엇일까? 졸업과 입학, 전학, 이사, 이민, 실연, 이혼... 여러 종류의 이별이 있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랜 이별은 죽음이다. 바다와 육지라는 삶의 토대를 떠나선 살 수 없는 두 생물의 이별은 각각의 생물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해진다. 이 둘의 이별은, 이별과 죽음에 대해 이승과 저승에 대해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린이들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목숨을 구명할 만큼 친한 사이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순진한 아이들은 아모스가 바닷가에 살고, 보리스는 그 해안가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순진한 아이들도 자라서 언젠가는 이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어리고 순진한 존재들의 가슴에 이별과 죽음이란 성인이 되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극복할 씨앗 하나를 몰래 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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