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의 서커스(Wasteground Circus, 1975) - 찰스 키핑 지음 | 서애경 옮김 | 사계절출판사(2005)
아내가 주문한 책이 내게로 왔다. 첫 장을 넘겨본다. 칙칙한 그림이다. 그런데 참 낯이 익다. "찰스 키핑"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그림을 보니 낯이 익다. 예전에 이 사람의 그림책을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찰스 키핑"의 "빈터의 서커스"를 보면서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내 기억 속 어딘가 버려져있을 빈터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봄바람이 황사를 몰고 왔을 때 바라본 거리 풍경이다. 시내 한 복판에 들어차 있던 낡은 주택이며 창고들이 헐리고 생겨난 빈터에서 두 아이, 스콧과 웨인은 공을 차고 놀았다. 첫 장의 그림은 저 멀리 공장과 새로 짓는 건물들 그리고 빈터와 그곳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두 아이가 그려져 있다. 두 아이가 차 올린 공이 마치 황사와 스모그에 가린 태양처럼 보인다. 만약 이곳이 런던이라면 이스트엔드의 어디쯤일 것이다. "스콧과 웨인", 이 두 아이는 아마도 런던이나 글래스고의 어디쯤 변두리에 사는 노동자의 자식일 게다. 우리식으로 치자면 서울 강남이 아닌 강북 어딘가. 이제 막 뉴타운 건설이 초읽기에 들어간 구파발이나 삼송리 어디쯤이 아닐까.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도 동춘 서커스단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뚝딱 지어올려진 거대한 장막과 풍악소리, 얼굴에 붉은 연지 곤지로 매무새를 다듬은 피에로, 그리고 끽끽 소리를 지르며 공중제비를 돌던 원숭이. 바나나 한 송이가 몹시 비싸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空의 매혹"이란 글에서 "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무엇보다도 그 삶의 첫 시기에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 순간을 다시 맞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수많은 시간들의 퇴적 아래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시간들이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는 것은 정말 섬?하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언제나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걸쳐 내내 지속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지없이 평범할 뿐인 세월들을 오묘한 무지개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고 말했는데, 찰스 키핑의 이 그림책은 마치 장 그르니에의 글 "空의 매혹"을 그림책으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서커스단이 온 것을 안 웨인과 스콧은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돈을 얻어가지고 빈터로 돌아왔다. 두 아이는 서커스단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서커스 단원들, 돈점박이 말, 사자, 영리하게 생긴 코끼리, 두 아이는 관람차를 타고, 회전 목마도 타고, 작은 기차도 타고, 미끄럼틀도 탔다. 그리고 드 높은 음악 소리에 이끌려 곡예가 펼쳐질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브라스 밴드 근처에 앉아 공연을 관람한다. 어릿광대들, 우아한 돈점박이 말들의 곡예, 외줄타기, 공중 그네, 불길을 뚫고 빠져나오는 사자, 코끼리 묘기까지 웨인과 스콧의 머리속을 온통 무지개빛으로 물들인 서커스가 한 바탕 지나갔다. 천막이 걷히고 짐차들도 사라졌다. 빈터는 다시 텅비었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간다. 세상은 다시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건 웨인에게만 맞는 말이었다. 스콧에게 이 빈터는 더이상 옛날의 빈터가 아니었다. 스콧은 서커스가 마을에 들어왔던 이 날을 오래도록 기억할 테니까. 스콧의 마음 속에서 그 빈터는 언제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어린이들은 누굴까? 그들은 어른의 축소판, 미래의 어른,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일까? 글쎄, 어떤 한 존재가 자신의 모습(본성)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 우리 옛 선인들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지만, 그건 잘 되었을 경우에 한정하는 게 좋겠다. 역사적 위인들을 살펴보면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장 그르니에로 돌아와서 "어떤 아이들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서 새벽빛이 결코 그들에게서는 떠오를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들이 문득 수의(壽衣)를 떨쳐 버리면서 나자레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수의란 다만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여러 해에 걸쳐 세월 위에 펼쳐진 이 아련한 꿈과 같은 기억이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세상이 비어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 세상 깊숙이 숨겨진 비밀스러운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건 아닐 게다. 그때 내 나이 몇이었던가?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 나는 결코 "행복한 왕자"가 아니었다. 운동장이 터질 듯 들어차도 내게는 텅 비게만 느껴지던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모두가 달리기하러 나가도, 나는 혼자 꼬래비로 서서 하늘을 보았다. 음악 소리가 낡은 스피커로 쩌렁쩌렁 울려도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때늦은 매미소리 뿐이었다. 솜사탕 과자, 고무 풍선, 만국기. 모두가 떠나버린 국민학교 운동장 한쪽 귀퉁이 쓸쓸히 가을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나는 차마 짓밟을 수 없었다. 모두가 돌아간 운동장에 쓰러져 있는 것은 모두가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은 운동회 날, 버려진 신문, 터져버린 고무 풍선, 철봉대 그늘에 웅크리고 앉은 채 아무도 오가지 않는 교문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아마도 해는 저물고, 국민학교 유리창은 그렇게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순간 어째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가 떠올랐었는지.... 그건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달리다 넘어져 생긴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그 따위는 기억의 아픔보다는 차라리 사치스러운 통증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아마도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없는 그런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있으랴? 그러므로 그때가 어느 때인가를 기억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세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란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아마도 키핑의 동화책 속 인물, 웨인과 스콧 두 어린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라면 스콧보다는 웨인에 가까웠을 게다. 어쨌든 나는 그 빈터 주변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나이를 먹고 어느날 그 운동장으로 되돌아갈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무도 없었던 운동장은 어린 아이에게 그 얼마나 광막한 공간이었을까. 방향을 알려 줄 이정표 하나 없는 사막처럼 느껴졌던 운동장이 한 눈에 보이던 순간... 나는 쓸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삶의 어딘가에는 빈터가 있다. 그 빈터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비록 어린 시절엔 통증이었으나 비어있음의 매혹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빈터. 그곳엔 두려움과 매혹이 공존한다. 누구도 제 자리에 갇힌 채 살아갈 수는 없기에 우리는 또 어딘가를 향한다. 마음 속의 빈터가 메워질지 아니면 성장과 함께 더욱 큰 공허로 함께 성장해 갈지는 알 수 없다. 찰스 키핑은 두 아이 중 어느 아이가 좀더 행복했을지 미리 색채를 이용해 보여주지만....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 미래를 점쳐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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