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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문학

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 - 민음세계시인선 55


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1886 - 1912)의 시집이다. 지금은 죽어 일본 하코다데에 묻혀 있는 시인. 교사 신분으로, 학교개혁을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시인이었다(당시 일본은 국가적으로는 부국강병주의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가 팽배했다. 말이야 '개인주의'였겠지만 '국가'가 강조되던 시기의 사람들로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스러웠던 '근대의 기억'은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근대화 역시 그들 사회의 내적인 필연성이나 필요에 의한 요구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라는 외세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일본의 한 전범은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묻는 법관에게
"그건 페리 제독에게 따지라" 했던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맥락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미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일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처럼 땅과 민중을 넘기고 상류층은 그 지위를 유지하는 방식이나 아니면 국력을 신장해 그들과 하루라도 빨리 대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만이 그들의 살 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을 배워 국력을 신장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외적 자극 아래 놓이게 된다. 일본은 서구를 통해 그들의 문물과 자본주의, 산업의 토대를 닦는다. 그러나 물질적인 면에서의 성장이 곧 정신의 근대화까지 일궈주지는 못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저서인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면 일본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같이 새로운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기술은 이식이 가능했지만 그 근저에 놓인 정신은 내면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근대화의 동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천황제를 중심으로 국가의식을 고취시켜 그 동력원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한 명치번벌정부(潘閥政府)는 차츰 증대되어 가는 시민의 대두를 오히려 막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일본에서는 사회주의나 기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인의 양심적 행위까지 위험하게 여겼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아'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억압하거나 자기 스스로에게 명확한 한계와 금기를 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안게 되었다. 근대화는 이들에게 그토록 무거운 주제였던 것이다. 이 무렵의 지식인들에게는 오직 문학과 예술만이 그런 자신의 고뇌를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되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그런 시대의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이들이 주장한 정한론(征韓論)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9월 밤의 불평>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 바람 듣는다" 과 같은 시를 짓는 등 소극적인 표현이나마 당시 일본의 대체적인 분위기와는 매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시인 백석은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의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때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여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왔다.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는 '백석이 팔베게를 하고 그의 시를 많이 읽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이토록 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시카와 타쿠보쿠는 데뷔 시절 젊은이의 이상을 노래하는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 강화되어 가던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 - 군인칙유(軍人勅諭)(1882),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 아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장 배척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학교에서 쫓겨난다. 실직한 이시카와는 그 뒤 별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 세츠코도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시인은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진 어머니가 애처로운 나머지 세 걸음을 걷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시카와의 삶은 궁핍했다. 그는 너무나 궁핍하게 산 나머지 폐결핵에 걸렸고,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의 아내 세츠코도 그 이듬해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는 데뷔 초엔 젊은이의 이상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표현해 갈채를 받았지만  죽기 몇 년 전부터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민중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도키 젠마로(土岐善棧) 등과 더불어 신잡지 <나무와 열매>를 기획하는 등 청년 계몽을 위해 노력했지만 몸에 깃든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코코아 한 잔

-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한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끝없는 논쟁 후의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을 홀짝이며
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깔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1911.6.15)


일본문학사에서는 그를 메이지 시대의 편협하고 관념적인 단가(短歌, 하이쿠)의 성격을 서민의 애환이 깃든 생활적 주제, 민중적 경향으로 해방시킨 최초의 시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다니던 회사로부터 해고까지 당했던 백석이 그를 좋아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위의 시 <코코아 한 잔>을 읽으며 나는 다쿠보쿠의 그 비린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 그러나 "끝없는 논쟁"이 지나간 뒤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함을 말이다. 거기 어떻게 더 긴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견딜밖에.



그외에도 국내에는 지난 1996년 한국문원에서 <슬픈 장난감>이, 1998년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55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선>, 1999년에 월인에서 나온 <일본의 국민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슬픔과 한> 등이 출판되어 있다. 그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이시카와 다쿠보쿠 편(http://windshoes.new21.org/literature/takuboku.htm)을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