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천자문 -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 김성동 쓰고 지음 / 청년사 / 2003년 12월
1.
소설가 김성동하면 먼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 "만다라(曼陀羅, 1978)" 그리고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하는 "화두(公案)"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읽은 "만다라"는 '빨간 책'에 버금갈 만큼 성적(性的)인 책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법운'이란 젊은 사문이 '지산'이란 사문을 만나 번뇌를 거듭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어머니는 들리지도 않는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찾아 헤매다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출해 버리고, 법운은 입산수도의 길을 택한다.
지산은 스스로를 잡승(雜僧), 땡땡이 중으로 자처하면서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었다. 법운은 점차 지산에게 경도되어 가지만 파계승도 못 되고, 대승세계의 자유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방황하게 된다. 어느날 지산은 법운과 함께 암자 아래 술집에서 만취한 채 돌아오다 산중에서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법운은 오랜 고민 끝에 여자와 동침하고 나서 세상에 뛰어든다. 이 소설엔 작가 김성동의 자전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는데, 법운이 처한 가계사와 흡사한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가족의 일원을 잃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쟁의 희생자라는 가계사가 지속적으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 우리 역사의 비극이 숨어 있다. 이 비극의 근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주변 친척 중 전시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은 그렇다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수도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고, 방어할 테니 정부를 믿고 수도 서울을 지켜달라는 말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시민들까지 '부역자'로 몰아 두고두고 연좌제로 괴롭힌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강팍함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도 각기 다른 작품 세계를 보이고는 있으나 김성동은 물론, 이문구, 김원일, 이문열 등도 역시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보이는, 보이지 않는 낙인의 피해자들이었다. 얼마 전 작고한 이문구 선생은 스스로의 삶을 '내 삶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너는 절대로 공부를 잘해서는 안된다. 공부를 잘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눈에 띄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다. 너는 절대로 공부를 못해서도 안 된다. 공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눈에 띄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바로 그 순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적당히 공부해라. 잘하지도 못하지도 말고 중간을 고수해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싹쓸이로부터 우리 사회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처신법이었다(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2.
어려서 김성동처럼 한학이 깊은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적은 없지만, "한석봉 천자문"을 앞에 놓고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을 공부한 적은 있었다. 누런 갱지에 괴발새발 글씨를 쓰는 건지 그림을 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으로 천자문의 한자들을 옮겨 적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한자 공부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는 어려서 천자문을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조기 교육이다, 뭐다해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대유행인데 만약 어려서 가르쳤을 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영어니, 미술이니 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는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한자의 유용성도 유용성이지만 우리 말 단어의 70% 정도를 구성하고 있는 한자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말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고, 글씨가 미술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서예란 점에서 조형감을 배우는데도 한자는 유익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천자문은 한문을 처음 배우는 이들을 위한 학습서인 것이 사실이나 그 격을 너무 낮춰잡는 경향이 있다. 중국 남조(南朝)시절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형식은 사언고시(四言古詩)로 250구(句), 합해서 모두 1,000자의 각각 다른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 우주는 넓고 거칠다"라는 첫 구절이 상징하듯 '천자문'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동양적인 사유 체계로 확장해간 중국의 철학 체계, 사상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천자문은 단순한 아동용 한자 학습서가 아니다.
그간 천자문엔 여러 서예가들의 이름이 붙어왔다. 전세계적으로 글자 자체가 예술의 경지로 평가받는 문화권은 내 개인적인 평가에 국한시키자면 한자 문화권과 이슬람문화권, 그리고 '타이포그라피'란 명칭을 만들어낸 라틴어문화권이 있다. 이슬람 문화권의 아랍문자는 종교적 금기상의 이유로 꾸란의 문자를 장식미로 승화시켰고, 라틴어는 성서를 양피지에 옮겨적는 수도사들의 작업과정에서 역시 장식성있는 알파벳으로 변환되어가며 여러 글자체가 되었다. 이 세 문화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자를 대했으며 그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알파벳에서의 서체는 활자라는 도구를 통해 기계화되어, 문자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해가는 형식이 되었고, 아랍문자는 아라베스크나 모스크의 입구를 장식하는 꾸란의 글귀처럼 회화나 조각을 대신하는 미적 대체제로 발전해갔다. 그에 비해 한자는 특정한 종교나 대량생산 방식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 할 것은 동양에서는 글씨가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 즉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인격 도야의 도구로서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인들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강조한 것은 단지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이 기준에 맞춰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잣대로 삼으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身은 단순히 풍채나 용모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세와 올바른 몸가짐을, 言은 말의 들고 남에 있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할지를, 書는 단지 글씨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왕희지의 천자문, 한석봉의 천자문도 있는데 구태여 김성동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다시 천자문을 썼을까?
3.
앞서 이 책의 저자인 소설가 김성동의 "위험한 가계(?)"를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이 책에 상당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동의 "천자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자문"이면서 동시에 소설가 김성동의 산문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통해 말하지만 시를 통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산문을 통해 말한다. 역시 소설가도 소설을 통해 말하지만 소설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산문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한가한 마음으로 또는 가벼운 기분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행위를 산책(散策)이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산책"의 "산"자가 산문(散文)의 "산"자와 같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성동 천자문"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 책 앞에서 어째서 "김성동"이란 이름이 붙는지 설명해준다. 저자는 어려서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 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 "만다라"의 '법운'처럼 불가에 입문해 번뇌했다. 그렇게 성장한 지은이가 직접 1천 자의 글씨를 쓰고, 이를 다시 '사언고시'를 두 편씩 묶어 문구를 해석하고 그와 관련한 자신의 상념 혹은 생각을 정리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 책은 "천자문" 책이자, 천자문에 대한 해설서, 그리고 저자 김성동의 에세이집의 형태를 지닌다. 그리고 곳곳에 그의 가계사가 드러나고, 당대에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녹아있다.
책 속에는 소설가 김성동의 선친인 김봉한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연희! 내 목숨이나 달음업시 그대를 사랑하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귀치 안이하고, 모-든 사람이 다- 목석과 같이 차고 쓸할지라도 ..... 신이여! 사랑하는 나의 안해 젊은 연희의게 가호하심을 앗긔지 말으시고, 연희여! 만리전정에 사시장춘의 행복을 사양하지 말어주오." 저자는 천자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자기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단지 "천자문"이 아니라 "김성동"의 천자문이다. 책에는 단단한 유학자로 살아온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빨갱이 자식(?)'으로 살아가며 그간 숨겨야 했던 저자 김성동의 간난신고와 부친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이 곳곳에 녹아 있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 국가가 정한 법률은 때로 가족간의 사랑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우선적으로 강제하는 법 규정을 두고 있다. 알베르 까뮈는 혁명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 총구가 내 어미를 향하면 그에 저항하겠다 하지 않았던가?
비사란야(非寺蘭若·절 아닌 절)가 쓰여 있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선 소설가 김성동씨.
(사진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291729015&code=960205)
4.
그렇다고 김성동의 <천자문>이 저자 자신의 사변에 빠져 신변잡기 수준의 글을 나열하고 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김성동은 우선 "천자문"의 기본 내용과 형식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책 "김성동 천자문"의 판형이 기존 단행본들의 두 배 정도 크기라 들고 다니며 읽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예로부터 "천자문"이란 신언서판의 길로 들어서는 입문서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책의 판형은 오히려 적당하다 할 것이다. 자고로 천자문은 서안(書案)에 정좌하고 앉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 책의 부제는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 하였으니 마땅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판형이 커진 명목상의 이유라면 실용적인 이유는 천자문, 즉 한자(漢字)는 서예(書藝)라는 생각해본다면 이 책을 미술 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 그래도 초스피드 사회에서 편리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일반 신국판 판형으로 '보급판'도 나왔다고 한다. 하기사 과거 정약용 선생도 누워서 책읽기를 좋아해 손에 들어오는 작은 책을 구해 읽었다고 하니, 보급판을 읽는다고 문제될 일은 없을 터...
올해는 천자문을 다시 손에 잡고,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를 배우고 익혀보는 것... 무척이나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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