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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문학

희망은 길이다 - 루쉰 | 이철수(그림) | 이욱연 옮김 | 예문(2003)

희망은 길이다 - 루쉰 | 이철수(그림) | 이욱연 옮김 | 예문(2003)

나는 "루쉰" 선생을 존경한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지만 존경한다는 건, 다른 말로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어요"란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음속으로 존경만 하고 그의 삶을 본받지 않는다면 존경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란 뜻에서 한 말이었다. 문제는 정작 말만 그렇게 하고 나 역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일 게다. "희망은 길이다"란 책을 나는 지금까지 근 10여 권 넘게 구입했다. 내가 이 책을 그렇게 많이 구입한 것은 내가 한 권을 읽고 난 뒤 나만 읽지 않고 좀더 많은 이들에게 루쉰의 글을 읽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그리한 것인데, 오늘 살펴보니 그간 이 책을 선물 받은 이들이 죄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이 책에 대한 간략한 리뷰 한 줄 없는 것이 안타까와 올려본다.


영미권 고전 가운데 90%는 재번역이 필요하다는 최근의 기사도 있지만, 루쉰에 관련한 꽤 많은 종의 책들이 있지만 번역 상태가 좋은 책들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한 이욱연 선생은 소장파 중국학자로 이 책의 번역 상태는 내 나름으로는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번역이 가장 좋은 책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고 들었다).


"희망은 길이다"
"루쉰 아포리즘"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루쉰 자신이 아포리즘으로 따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욱연 선생이 루쉰이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하고 있는 글들 가운데 엄선해 편역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얼마전 리뷰했던 생텍쥐페리의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와 같은 형식의 책인 셈이다. 하지만 유혜자 편역의 그 책과 결정적인 차이는 판화가 이철수 선생의 판화작품들을 컬러 도판으로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까지 감안해보면 책값을 비싸다고 할 수 있을까. 루쉰 선생의 글에, 이철수의 판화, 이욱연의 번역이라면 불경하옵게 자본주의 상품으로 보더라도 진경(眞景)에 속한다.


사실 국내 시인, 작가들의 이름으로 나온 아포리즘들 가운데 읽을 만한 것을 그리 많이 발견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에밀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을 좋아하고,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준 감동을 잊을 수 없는 나로서는 뭔가 태부족이거나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은 이전의 생텍쥐페리의 글에서 따온 아포리즘을 읽었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문제는 아포리즘이 문학적 글쓰기 행위의 일부란 것을 철저하게 느끼지 못한 이들의 책임도 따를 것이다. 아포리즘에 대한 인식이 책을 읽다가 그저 좋은 구절에 밑줄 긋고, 이를 옮기는 것이거나, 시인들이 시상을 떠올렸으되 이를 시로 옮기지 못한 시작 메모를 책으로 엮어도 좋을 그런 만만한 행위로 느낀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이 책 "희망은 길이다" 역시 본질적으론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루쉰의 글이란 것이다. 루쉰은
"피로 쓴 문장은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쓴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변색되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루쉰은 20세기 중국문학의 핵심이었다. 마오쩌뚱은 루쉰을 일컬어 "위대한 문학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라고 평한다. 물론 루쉰의 문학적 정수들은 그의 소설들에서 표출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루쉰을 루쉰으로 만든 것은 우리가 흔히 잡문(雜文)이라 치부하는 컬럼, 기고문, 편지와 같은 것들에서 등푸른 생선의 지느러미처럼, 숫돌에서 것 벼려낸 칼날처럼 시리게 날 선 짤막한 문장들이었다. 루쉰의 글들은 피로 쓴 문장보다 더 짙은 향기와 생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루쉰의 글들, 산문들(소설은 제외)은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
"희망은 길이다" 이기도 하지만, 그는 유독 희망과 절망을 대비시켜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도 나오지만 중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 안에는 이렇듯 대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


"나그네의 뜻은 편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즉 앞길에 무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기어이 가는 것, 바로 절망에 대한 반항이다.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


"정치는 현상을 유지시키고 통일시키려 하고, 문학 예술은 사회 발전을 촉진시키고 점차 사회를 분열시킨다. 문학과 예술이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사회는 그래야만 발전한다. 문학과 예술은 정치가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되고,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루쉰의 글들 가운데는 지금의 관점에서 읽노라면 분명 논쟁이 될만한 것들도 적지 않다. 가령, 중국 책은 읽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거두절미하고 실려 있는 걸 보면, 대관절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당시 루쉰이 살아가던 무렵의 중국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그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루쉰에게 접근하는 최초의 책으로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의미가 있다. 좀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품고자 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겐 그 나름의 의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