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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길 위의 인생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3. 마이티네팔과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3. 마이티네팔과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

▶ 하이얏트리젠시 내부에서 전통악기를 이용해 공연을 펼치고 있는 네팔 음악인들


박영석 대장과 빌라 에베레스트
카트만두 시내에서 약간 외곽에 있는 스와얌부나트에서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하이야트 리젠시로 가기 전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정의 동반자였던 앙 도르지 셰르파(Ang Dorjee Sherpa)가 함께 운영하던 카트만두 시내의 빌라 에베레스트(http://www.villaeverest.co.kr)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마도 네팔에서 먹게 될 처음이자 마지막 한식 식사일 텐데 저녁 메뉴는 한국식 삼겹살이다. 네팔을 찾는 트레커들이나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쯤 거치게 되는 쇼핑 거리, 한국에 이태원이 있다면 네팔에는 타멜 거리가 있다. 언젠가 내게 그럴 만한 여유가 이곳 타멜 어딘가에 허름한 방 하나를 구해 며칠씩 머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난 왜 이리 인간이 구질구질할까). 그 타멜 거리에서 우측으로 살짝 빠지면 주머니가 얄팍한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숙소들이 밀집해 있는데 그곳에 빌라 에베레스트가 있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는 물론 한국인 관광객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거치게 되는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 직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박영석 대장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여행길에서 계속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 역시 이번 문화기행과 겹친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위에 소개해둔 빌라 에베레스트의 웹 사이트를 보면 되겠지만 이곳에 소개되고 있는 기사 중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고동률)가 쓴 기사도 있어 반가웠다.


오늘날 셰르파(sherpa)란 히말라야 등반이나 전문적인 트레킹 가이드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네팔 고산 부족의 명칭이다. 앙 도르지 셰르파의 이름에 셰르파가 붙은 것은 그가 실제 산악가이드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명이 성씨(姓氏)처럼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앙 도르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삼부토건이 네팔에 건설하는 댐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1978년 한국 트레킹 팀과 함께 일했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트레킹 팀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한국에서 파견 나온 주방 아주머니들로부터 한국 음식 만드는 법과 한국어를 배웠다. 1983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한 앙 도르지는 1990년 한국에 나와 한국어 공부를 했고,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를 따라 다시 네팔로 들어왔다가 1991년 6월부터 빌라 에베레스트를 인수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와 트레킹 팀을 돌보고 있다.


▶ 카트만두에서 치트완 가는 길에 만난 소년들(카트만두 시내 저 때만 해도 엉덩이가 그렇게 시달리게 될 줄 미처 몰랐다. ㅠ.ㅠ)


이제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은 지구의 3극점,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른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와 같은 기록을 가진 사람은 인류를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이것을 일컬어 산악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는데 이처럼 엄청난 기록을 가진 그는 어째서 또다시 안나푸르나에 갔던 것일까? 그 대답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고작 트레킹 제1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에겐 말이다. 다만 그를 아는 사람들, 그와 원정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원정대를 꾸리고 산을 함께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선 함께 여행을 하라고 했던가? 보통의 평범한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들키고 만다. 그런데 숨을 할딱이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에서야 오죽할까? 남에게 베풀 만한 친절 같은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많은 원정대가 팀워크 문제로 정상 등정을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설령 정상 등정에 성공했더라도 지상에 내려와서는 서로 남남처럼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영석 대장팀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산 아래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했고 언제든 박영석 대장의 "가자" 그 한 마디면 아무 말 없이 그 산으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네팔 현지에서도 박영석 대장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제법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박영석이란 이름 석자 뒤에 언제나 ‘대장’이란 호칭을 붙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그 말이 흘러나왔다. 박영석 대장.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탐험하지 않는 탐험가는 탐험가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신대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게 탐험이고 도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 같은 탐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팔 카트만두의 빌라 에베레스트. 이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박영석 대장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얏트 리젠시에서 네팔의 현재를 보다


▶ 하이얏트리젠시 호텔 현관 모습. 나중에 따로 설명할 일이 있겠지만 네팔의 건축 양식은 사원의 건축 양식을 많이 본뜨고 있는데 지붕 꼭대기에 첨탑 형식의 작은 표식이 있는데 이것을 '가쥬르'라 하고(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처마 끝에 가로로 길게 연이어 세워져 있는 나뭇살을 '툰다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문양과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들어가는 문 위에 반원형 형태로 되어 있는 장식은 '토라나'라고 해서 모시고 있는 신을 새겨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삼겹살에 에베레스트 맥주를 마시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하이얏트 리젠시로 향했다. 스와얌부나트에서 빌라 에베레스트까지 가는 20분 거리라고 하는데 카트만두 특유의 교통난 때문에 좁은 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버스 안에 갇힌 채 거의 2시간을 보냈는데 저녁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오니 출퇴근시간이 지난 탓인지 20분도 안 되어 저녁 8시 반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장거리 비행에, 버스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시달린 탓에 숙소에 도착하는 데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장 내일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는 데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이얏트 리젠시 호텔에 도착해 일행의 숙소를 체크하고 방 배정을 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오늘 아침 우리가 도착할 때 공항이 다소 붐빈다고 했더니 그것이 오늘 출국해야 하는 비행기들까지 연착시켜 호텔에 머물던 승객들 중에 체크 아웃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뒤늦게 승객들을 빼고 부랴부랴 객실 청소를 하는 중이라 숙소에 체크인을 할 수 없다니 기가 막혔다. 네팔인 호텔리어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한 편으론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나와 한국인 가이드, 현지 가이드까지 붙어서 항의해봤지만 항의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일단 연세가 많은 분들부터 우선 방 배정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인도·네팔 문화권 특유의 현상이기도 할 터였다. 현지 가이드에게 말해서 일류 호텔이라는 하이얏트 호텔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 호텔 매니저를 통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으면 클레임을 걸겠노라 엄포를 했다. 그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다시 이곳에서 2박 3일간 머물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여행의 기획자라 주최한 입장이나 마찬가지이니 가장 늦게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탓도 있고, 여행의 설렘이 뒤늦게 나타난 탓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1층 숙소라 객실 문을 열면 곧바로 정원과 연결이 되어 있어 아침 산책을 했다. 호텔은 인도에 지어진 영국식 건물 스타일에 카트만두 특유의 네와르 식 건축 스타일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처마 끝에 비둘기 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내가 나서자 후두둑하는 날갯짓과 함께 떼를 지어 날아올랐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네팔 최고급 호텔이란 명성에 걸맞게 정원이나 수영장, 테니스 장 등 부대시설이 훌륭하다. 꽃피는 계절에 왔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난 호텔리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운 뒤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호텔 조식 뷔페로 먹었다. 사실 호텔이란 공간만큼 세계화되어 있는 곳도 없기에 어딜 가든 호텔 식사는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호텔을 일컬어 어떤 이는 ‘세계의 창’이라고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호텔이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쇼윈도이지 그곳 현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니다. 이곳에서 제공된 아침식사도 다분히 서구화되어 있었지만 그 기본만큼은 네팔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치트완국립공원으로 우리를 실어 나를 버스에 오르니 호텔 매니저가 찾아와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 짓기로 했다.


카트만두에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Royal Chitwan National Park)에 이르는 여정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은 카트만두에서 서남쪽으로 약 160㎞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한국식 거리 개념이라면 길 막히는 걸 고려하더라도 넉넉잡고 2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네팔이고, 네팔의 시간은 네팔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현지 가이드인 아눕은 아예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란 뉘앙스로 주의를 준다. 혹시 치트완에 가다가 볼 일을 보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해 달라, 다만 화장실이 있어서 차를 세우는 게 아니라 길가에서 볼 일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일행 중에는 인도를 다녀온 이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라며 농담을 건넨다. 아눕이 어떻게 아셨느냐며 맞장구를 치니 일행이 까르르 웃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버스에서 내려 일 보는 건 좋은데 조용히 숨어서 볼 일을 보고 싶다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분은 주의하란다. 왜냐하면 언제 폭탄을 밟을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네팔이 내전을 치렀다고 하더니 길가에 무슨 지뢰라도 있는 모양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폭탄이란 다름 아닌 인분이다. 실제로도 일행 중 한 사람이 밟고 들어와 일행은 물론 버스 기사의 조수를 애 먹인 적이 있지만 길가에서 볼 일을 볼 필요는 사실 없었다. 다행히 중간 중간 허름하지만 칸막이가 있는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인도보다 나은 편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네팔의 공공 교통에는 빠짐없이 조수가 타고 있는데 이들은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버스 내부 청소부터 궂은일은 모두 도맡아 처리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이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기사 역시 전에는 조수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다. 운전 기술을 그렇게 해서 배운다는 것이다.


▶ 워낙 노면상태가 거칠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나마 건진 한 컷. 사진에 모두 나와있진 않지만 만약 버스가 절벽에서 구른다면 대략 100여 미터는 굴러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가파른 낭떠러지이다.


네팔은 인도 대륙 북부와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 사이에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 나라인데 동 네팔과 서 네팔을 잇는 도로는 실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도로는 해발고도 2~3,000m가 넘는 고산지대를 끼고 건설되어 잘해야 2차선이고, 그나마도 포장이 잘 되어 있지 못하다.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도 국경에서 온갖 물건을 과적한 상태에서 트럭과 버스들이 오가다 보니 도로의 여기저기가 파여 울퉁불퉁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이브 몽땅 주연의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 The Wages Of Fear)>란 영화에 나왔던 길은 차라리 안전하다고 말해야할 듯 싶다. 도로 폭은 좁고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것 같다. 그런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네팔의 공공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문 밖에 매달려 있거나 지붕에서 한가롭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마이티 네팔과 고속도로 휴게소
카트만두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버스가 카트만두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야 비로소 네팔이란 나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은 한국의 산지처럼 야트막한 경사를 그리며 완만하게 솟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치솟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산 중턱까지 계단식 논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올라가 있다. 이런 풍경은 네팔의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 도로가 들어오면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우리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날 무렵 버스가 멈추고, 조수가 뛰어내린다. 아눕은 길 한 편에 서 있는 두 개의 초소 같은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하나는 네팔 고속도로 비용을 거두는 톨게이트이고, 하나는 올 여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네팔의 인권운동가 아누라다 코이랄라가 설립한 ‘마이티 네팔’의 감시초소라고 한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수여하는 ‘제15회 만해대상’을 받은 '마이티 네팔'은 평범한 네팔의 어머니이자 주부였던 코이랄라 대표가 어느 날 인도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게 되어 지난 1993년부터 여성의 인신매매에 반대하고 감시하는 기구로 설립한 기구이다. 본래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련한 작은 방 한 칸으로 시작해 가정폭력과 인신매매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고, 구걸하는 여성들에게 밥을 제공했다. 마이티네팔은 현재 29개 국내 지부와 세계적인 후원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공로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고, 할리우드의 배우들 중에도 데미 무어는 마이티 네팔을 지원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마이티 네팔(http://www.maitinepal.org)'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영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힘센(mighty) 네팔'이 아니라 ’친정 어머니(maiti)의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경고판이다. 가난한 네팔 여성들에게 돈과 직업, 결혼을 빌미로 접근해(요즘은 여성들이 중개상으로 많이 나서는 추세라고 한다) 위장결혼시킨 뒤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면 남성이 성매매 업소에 인신을 팔아넘긴다고 쓰여 있다(사진은 룸비니 국경 근처의 바이라하와(Bhairahawa)에 세워져 있는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곳이 인신매매의 중심이라고 한다).


실제로 코이랄라 대표는 '네팔의 어머니'란 별명으로 불리운다. 마이티 네팔은 인도 등지로 성노예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 1만 2천여 명을 구출했고, 사회의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자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네팔 여성을 유혹해 인신매매하는 방식이 주로 시골 여성들에게 접근해 사기 결혼이나 일자리 등을 주선하여 데려가는데 주로 인도 등지로 팔려간다고 한다. 톨게이트 앞을 지나는 차 안에 혹시 젊은 여성이 타고 있으면 마이티 네팔 요원들(이들 역시 ‘마이티 네팔’에 의해 구조된 여성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차를 세우고 여성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 수상쩍다 싶으면 젊은 여성을 맡아 보호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단다.


카트만두를 벗어나 두 시간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뒷좌석에 앉아 공중부양에 온갖 재주를 부리며 달렸을까? 자기들 말로는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자며 차를 세운다. 한국이 세계에 내세울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여행을 많이 다녀본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커피 믹스와 고속도로 휴게소를 말하곤 하는데 네팔의 고속도로(?) 변에 있는 휴게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실 괜찮았다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한적한 길가 언덕을 따라 나무 그늘이 있고, 맛있는 밀크티(이곳 네팔 말로는 ‘찌아’, 인도 말로는 ‘짜이’라고 하는)를 마실 수 있었다. 거친 도로를 달리느라 혹사당한 엉덩이도 쉬게 할 겸 해서 잠시 휴게소에 들러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자연석 평상에 둘러 앉아 네팔식 밀크티를 마셨다. 인도나 네팔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밀크티 맛을 잊지 못하는데 한국에서 커피에 절어 있던 나 역시 이곳의 밀크티 맛이 지금까지도 입 속에 아른거리는 기분일 만큼 이곳이 밀크티 맛은 한국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고, 한국에선 이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