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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나희덕 - 상현(上弦)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상현(上弦)달을 영어로는 'first quarter'라 부른다. 과학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매가리 없고, 풀 죽는 느낌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달은 언제나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원시시대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돌아와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의 온기로 휴식.. 더보기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