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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야 할까 싶다가도 세상에 아픈 이들 그지 없이 많아 그들이 내 몸뚱이 병들 대신 앓아주지 싶어 고개가 떨어진다.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또 누군가의 길을 헤매이게 했음을 안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는 남는"다. 혹여 나로 인해 길잃은 이들이여! 나역시 누군가로 인해 길잃은 적 있었던 가슴앓이 동업자였음을 부디 그대들은 잊지 마시게나.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냄새와 어지런 발걸음으로 세상의 길들을 흐려놓았느냐.
그리고 아직도 그 길 위에서 헤매고 있더냐. 세상의 모든 길이여, 나에게로 오라. 내 길 위의 창녀로 쓰러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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