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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사랑이란 게 함께 초코렛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공원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이나 헤아려 보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함께 백화점에 가서 사주지도 못할 물건이나마 맘껏 구경하다가 지하식품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사서 나눠먹고 웃으며 돌아올 수 있는 일이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영화표 끊어놓고 딴짓하다 영화 시간에 늦어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시간마저 재촉하며 자리로 헐레벌떡 뛰어드는 거라면 참말 좋겠다. 집으로 바래다주는 좁은 골목길, 어슴츠레한 불빛 아래 가쁘게 요동치는 심장소리 들키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 고작 그게 전부라면 참말 좋겠다.

**

하루가 힘들 때는 사랑도 지겹고, 지겹고, 간사하게 매일 변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드러나는 외연에 불과하다.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우리는 만나서 사랑을 시작한다. 어떤 형태로든 만나지 않고서야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가?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모든 인생의 끝이 늘 그러하듯 사랑의 끝 - 완성엔 언제나 이별이 존재한다.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혼이나 이별이 아니라 하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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