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김수영 -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어떤 시는 해석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다. 마음으로 쓰인 시라 그럴 수도 있고, 비슷한 심리적 정황 속에 스스로 놓여 본 경험이 또한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말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로 시인은 지장보살의 현연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기능이 시인의 기능과 일정하게 맞아 떨어지는 탓이 크다. 지장보살은 불덕으로 보자면 부처가 되고도 남는 이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은 염라지옥의 가장 하층의 저주받은 중생들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염을 세운 이가 아닌가. 물론 시인들이 모두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스스로 그리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는 묻지 말자. 비유일 뿐이니까.

같은 말을 풀어내는 이들이지만 산문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가 바로 시인이라는 데 있다(유치하게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 인해 드러내진 부분 이외에 말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혹은 보다 멀리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양손을 모아 시야를 좁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의 양손을 들어 우리의 눈을 보다 자세히,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깊이, 자세히를 통해 넓이를 확보해내는 것이다.

그런 시인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 동계라는 것은 숨이 차오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고,숨이 차오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생리적, 본능적 현상들 - 기침, 한기 - 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속해있는 혹은 뗄 수 없는 관계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가 죽음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번째 연에서 시인의 그런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할 수도 있고, 원근감의 상실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의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을 이탈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질문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의문과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의문은 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어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순간. 그것은 폭력의 순간이거나 강압의 순간이다. 묻고자 하나 물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은 곧 깨달음이지만 세상은 나의 깨달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연에 가면 그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 침묵의 결과, 마음 속 동계의 결과들은 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시인은 세상의 불의나 억압에 대해 진실을 고하고 싶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매우 구체적이라 그는 조무래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삶은 허접하다. 말하지 못하는 말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도, 친구도 점점 그를 업수이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지 못한다. 공연한 타박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너 혼자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니 하는 그런 일리있는 포기의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4연의 역설은 놀랍도록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하늘의 빛, 물의 빛, 우연의 빛인 말은 고로 우연히 나에게 스며든 말일 수도 있다. 천지 사물 속에 깃든 빛의 말은 감히 나같이 하찮은 존재에게 스밀 수 없는 말이므로 감히 나의 말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말들은 -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 이다. 말은 나의 말이되, 나의 말이 아니다. 시인은 고립됐다. 그의 말은 신의 말을 모사하는 방언이 되었고, 방언은 지껄인다 한들 그것을 해석해줄 이 없으니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는 만능의 말이다. 그의 말을 겨울의 말로 만들던지, 봄의 말로 만들던지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