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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오규원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

내일을 말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새해를 맞은 이들에게..
때로 몇 마디 시어로 다루어지는 죽음은 너무나 친밀하여
공포를 잊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공포를 잊는다고 해서 죽음이 지닌 힘도 잊을 수는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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