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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성년(成年)의 비밀

- 마종기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출처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

이 시 <성년의 비밀>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실린 시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오늘날 우리가 '번지 점프'라고 일종의 레저 스포츠 삼아 하는 놀이의 유래가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과 담력을 부족민들에게 보증하기 위해 30미터 가량의 점프대 위에 올라서서 발목에 나무줄기를 엮은 밧줄을 묶고 뛰어내리는 의식이다. 걔중에는 계산 착오로 맨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도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성인식인 셈이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에게는 그 행위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성인식이겠지만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런 성인식이 의미가 있을까? 시인은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를 찬미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건다는 비장한 행위에서 젊은이의 치기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 이르면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라고 말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끝없는 도전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오히려 시인은 어른됨의 비밀 속엔 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는 듯이 보인다. 유한한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아무리 날아올라도 완성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시인은 일찌감치 알려주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우리에게 포기를 강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최후라고 속삭여다오"라고 말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부딪치고, 다치며 우는 소리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해준다. 성년의 날개를 접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인가 보다. 새로운 도전이나 열린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간 쌓아온, 그간 걸어온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성년에 담겨진 비밀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다르게 살기를 꿈꾸지만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다르게 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며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다. 어제의 어느 한순간 비워둔 시간은 되돌아 오늘의 뒤통수를 치거나 오늘 그것을 피해갔다고 해도 내일의 어느날엔가는 분명 뒤통수를 칠 것이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는 것에서 우리가 슬퍼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빛의 열린 가능성이 빚어낸 나의 슬픔을 접어둘 수 있는 삶의 여유 - 여유란 말은 얼마나 슬프냐? 여유란 다른 말로 체념과 포기를 의미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할 시간과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여유를 얻는다. 친구가 불러내는 술자리를 전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달간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낼 수 없다 - 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자신의 아픔과 절망에만 눈을 돌리는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나의 치기어린 슬픔을 닫는 과정을 통해 보다 넓은 시야와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어른됨의 비밀은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 헤매는 부나방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일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그러니까. 무언가에 목숨을 걸 수 있다고 아직 믿고 있는 동안의 나는 타인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악을 쓸 수 있는 동안, 그것이 나를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속이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사랑이 불륜이든, 아니면 수간(獸姦)이든, 근친상간이든 상관없이 사랑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용기 아닌 용기가 순수한 것이라고 신뢰하고 있는 동안의 나는.... 시인을 죽이고 싶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부러뜨려 봐야 그 안에서 황금알을 만드는 비결을 알 수는 없겠지만.... 마치 어느 살인자가 소녀의 페티쉬즘을 넘어서 그녀의 뱃속엔 뭔가 좀더 아름다운,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던 것처럼 나 역시 그런 믿음으로 충만해 있을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면 그 안에서는 비명 대신에 시(詩)가, 아니 신음조차도 시적(詩的)일 거라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제2연의 첫째 행과 둘째 행 같은 구절이 과연 그냥 나올 수 있는 구절일까. 나는 이 시를 처음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성통곡했다. 아프지만, 아프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날아도 날아도 끝없는"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 행위다. 이카루스가 추락한 것은 너무 높이 날아서가 아니다. 날개를 접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카루스는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한 피터팬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그런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슬픔이 더이상 빛의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 뿐. 성년의 비밀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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