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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이성복 - 편지 편지 -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 더보기
김경미 - 멸치의 사랑 멸치의 사랑 -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 요 근자 들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시인은 김경미... 시는 '묘사'라고 배웠지만, 시의 묘미 중 하나는 분명 '진술'. 진술이야말로 시의 진경이기도 하다. 다만, 조심할 것 한 가지는 '진술하되 진부하지 않을 것!'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어디 멸치 같은 사랑만 그러하랴. 사랑이라 이름 붙은 것들은 죄다 그 모양이지. 더보기
실비아 플라스 - 아빠 실비아 플라스는 내게는 조금, 혹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다. 대학생은 아닌데 남들은 대학생인 줄 착각하던 시절에 나는 노가다 뛰는 젊은 막장 인생이었다. 그 무렵엔 왜 영화들도 하나 같이 그런 부류의 영화들이 많았던 건지 몰라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영화들 중에는 방황하는 청춘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이문열 원작, 곽지균 감독, 정보석, 이혜숙, 배종옥, 옥소리 주인공의 영화 "젊은 날의 초상"이 그랬고, "걸어서 하늘까지", 박광수 감독, 문성근, 박중훈, 심혜진 주연의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영화들 말이다. 한 시대를 떠받들던 이념이 무너진 시대에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던 셈이다. 어쨌든 내가 실비아 플라스를 알게 되었던 시대가 대략 이무렵이었다. 8.. 더보기
곽효환 - 삶 이후의 삶 삶 이후의 삶 - 곽효환 지구 역사상 스스로의 수명을 끊임없이 놀라울 정도로 늘려온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직 면한 가장 큰 고민은 삶 이후의 삶이다. 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 고원에 자리 잡은 고대 잉카 제국의 후예들은 인생은 사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살만치 살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좋은 날을 택해 가족과 친지, 은인, 더불어 살고 있는 마을 사람 그리고 척 지고 등 돌렸던 사 람들까지 모두를 불러 성대한 잔치를 연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세상일에 손을 놓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오랜 관습이다. 사람들도 그날 이후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보아도 보았다 하지 않는다. 남은 삶은 그렇게 살아 있으나 죽어 있고 혹은 그.. 더보기
김왕노 -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 김왕노 이별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는 백년이 참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쓰린 몸에 감각에 눈물에 스쳐가는 세월이 무심하다 생각했습니다. 백년 산다는 것은 백년의 고통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상처고 아픔이고 슬픔이고 다 벗어버리고 어둠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축복이라 했습니다. 밑둥치 물에 빠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엉거주춤 죽어지내듯 사는 주산지 왕버들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부터 백년은 너무 짧다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익히는데도 백년은 갈 거라 하고 손 한 번 잡는데도 백 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주 보고 웃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백년 동안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꽃피우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랑.. 더보기
고영조 - 맹지 맹지 - 고영조 맹지盲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오세영 시인이 우포에서 가르쳐 주었다 경기도 안성 어딘가 만년에 누옥을 앉히겠다고 마련한 곳이 길 없는 땅 맹지라고 맹인이 있으면 맹지도 있다는 뜻이다 눈멀고 귀 먼 청맹과니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길도 마음도 닿을 수 없다면 그게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혜안이 눈부시다 가시덤불 길길이 우거진 저 쪽에 맹지가 있고 마음 굳게 닫힌 저쪽에 그대가 있다 산하도처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버려져 있다 눈 먼 마음으로 가는 그 곳에 맹지가 있다 그걸 배웠다. 출처 : 시집 2010. 현대시시인선 * 길 없는 땅, 길을 낼 수 없는 땅을 가리켜 '눈먼 땅'이란 의미에서 '맹지(盲地)'라 부른다는 걸 이 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시의 정황을 살펴보.. 더보기
송경동 -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3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3 - 송경동 충남 서산군 대산면 돗곳리 삼성종합화학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를 내고는 서산경찰서 대용감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다시 내 인생 좃돼부렀다고 자포자기 신입식을 거부하자 돌주먹들이 날라왔다 두 번을 끌려 나갔다 오자 전라도 깽깽이놈이 벌떼짓 한다고 간수들이 제일 센 방으로 집어넣어버렸다 죽어라는 소리였다 목이 졸렸던가 두 번 기절하고 깨어보니 온몸 근육들을 자근자근 밟아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고 빌어라 했지만 침만 한번 뱉어주었다 피가 흥건한데 아무데도 터진 곳이 없었다 쓰라려보니 음경 끝이 찢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궁금한 건 어떻게 밟아야 거기가 짓이겨 찢어지냐는 것이었다 참 별난 경험도 다 있다라는 생각 서산 조폭들이 땜통님 땜통님 이 새끼 데리고 나.. 더보기
송경동 -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 송경동 광양제철소 3기 공사장 배관공으로 쫒아 다니다 잠시 쉴 때였다 10년 된 고물 프레스토를 빼서 폼잡고 다닐 때였다 읍내 정다방에 미스 오가 왔다 메마른 시골 읍내에 촉촉한 기운이 돌고 볕이 갑자기 쨍쨍해질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뻔질나게 다방을 드나들고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시켜 먹었다 어느 비 오던 날 낙안읍성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사랑고백을 했다 그날 저녁 담장을 넘어 내 품으로 한 마리 고양이처럼 달겨들던 그녀, 열 아홉이었다 처음으로 성을 배웠던 시간들 빚이 져서 떠나가던 그녀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어느 발전소 공사현장으로 떠나야 했던 나 아름다웠던 시간만을 기억하자고 깨끗이 돌아섰던 우리 돌아보면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그녀 * 황해문화, 2011년 겨울호(통권.. 더보기
이병률 - 스미다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더보기
고정희 -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