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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고정희 -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부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고정희 시인의 무덤엔 가본 적 없으나 대둔산 가는 길가 쓸쓸하고 외롭게 서 있는 시인의 생가에는 다녀와 본 적이 있다. 늦은 오후 길고긴 해바라기 늦은 태양이 저물던 무렵, 차를 돌려 되돌아 나올 수 없어 가던 길로 곧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그 길 한 가운데 고정희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 고작 이것이었나? 할 만큼 허전함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한 그녀의 생가엔 빛 바랜 양철 입간판이 지리산의 시인 고정희를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잊고 지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해남 길, 논두렁 사이 고즈넉하게 서 있던 그녀의 집 앞에서 나는 문득 그녀의 "더 먼저 더 오래"가 떠올랐다.

시인이여, 당신의 마음에 누굴 품었기에, 아니 무엇을 품었기에 고통의 불도장(火印)마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찬란할 것이라 노래하였을까요? 그것은 혹여 사랑의 세 가지 보물(三寶) - 상처와 눈물, 외로움이었던지요. 그래서 당신이 가신 뒤 당신 집 앞으로 그토록 샛노랗게 물들인 벼이삭과 햇살과 대둔산을 보여준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