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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허수경 - 마치 꿈꾸는 것처럼 마치 꿈꾸는 것처럼 -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 더보기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 내 마음은 깃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사람들은 마음이 오색창연하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펄럭인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에 바람 들었다느니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마음은 깃발, 깃대에 사로잡힌 채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이 다.. 더보기
천양희 - 사라진 것들의 목록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더보기
공광규 - 얼굴 반찬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출처 : 공광규,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2008) *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좁은 방 정면으로 .. 더보기
이재무 - 제부도 제부도 -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을 고하면 채 10분도 안 되어 후회가 시작된다. 가득찬 달은 이지러지게 마련이고, 가득찬 사랑은 달과 함께 시든다. 조석의 변화처럼 사랑도 어김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더보기
이문재 - 마흔 살 마흔 살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나이를 먹으면 옛날일은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한데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더보기
정해종 - 엑스트라 엑스트라 -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출처 : 정해종, , .. 더보기
박목월 - 이별가 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나는 지금도 제일 처연한 시 중 하나로 신라 향가인 를 손꼽는데, 박목월 선생의 이 시 역시 못지 않다.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하는데 와락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은 걸어서도 건.. 더보기
박영근 - 길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 더보기
오규원 - 모습 모습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인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육체는 명동 골목 사이로 쏴아하고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가늘게 흔들렸으므로...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을... ** 교수가 되기 전에 시인이란 생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직업으로 오랫동안 편집자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