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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최승자 -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 더보기
김남주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 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 가수. 안치환의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 그리고 가장 .. 더보기
기형도 - 그 집 앞 그 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 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더보기
이성복 -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우리 문학사에서 1980년대는 단연코 '시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이해하지 못할 몇 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한 가지는 1960년의 초반 최인훈의 을 필두로 황석영의 , 윤흥길의 , 전상국, 이청준, 박완서 등등 많은 작가들이 소설 문학의 부흥이랄까 - 특히 은 남한의 작.. 더보기
김혜순 - 참 오래된 호텔 참 오래된 호텔 - 김혜순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더보기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 미들클래스 블루스 미들클래스 블루스 -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우리는 배부르다. 우리는 먹는다. 풀이 자란다. 지엔피가 자란다. 손톱이 자란다. 과거가 자란다. 거리는 한산하다. 종전 협상은 완벽하다. 방공경보는 울리지 않는다. 다 지나갔다. 죽은 이들은 유언장을 썼다. 비는 그쳤다. 전쟁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급할 것이 없다. 우리는 풀을 먹는다. 우리는 지엔피를 먹는다. 우리는 손톱을 먹는다. 우리는 과거를 먹는다. 우리는 감출 것이 없다. 우리는 늦출 것이 없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가? 시계가 다시 돌아간다. 상황은 정돈되었다. 접시는 씻겼다.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다. 버스는 비어있다. 우리는 불평할 수.. 더보기
박재삼 - 가난의 골목에서는 가난의 골목에서는 - 박재삼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 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 박재삼 시인의 이라는 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재삼 시인의 서정성을 좋아합니다. 그분의 시를 읽는 것은 '그럴 연(然)자'를 읽는 기분이 듭니다. 이 시에서는 특히 "그 눈물 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