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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기형도 - 그 집 앞


그 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 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80년대의 청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상처를 입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참여한 까닭에, 그렇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한 사람은 배회한 까닭에, 그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무시한 까닭에, 억압하려 들었던 사람들 역시 어김없이 억압하려 한 까닭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데 기형도가 죽었다는 소식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실 기형도의 등장과 퇴장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가 처음 문단 데뷔를 하고, 첫시집을 내고 그리고 종로3가의 허름한 극장에서 죽었을 때, 우리들은 몇 가지 풍문을 들었다. 하나는 그 극장이 동성애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란 것과 그가 어째서 심야의 그 극장에서 고개를 뒤로 꺽고 숨져야 했는가?하는 사실이 기묘한 씨줄날줄이 되어 풍문을 증폭시켰고, 그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들이 또한 그의 전설에 먼지를 더했다. 소설가 강**씨와의 연애설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기형도의 시는 80년대의 많은 상처입은 청춘들에게 알수없는 위안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풋풋한 자기성찰들로 가득했고, 따뜻했고, 외로와서 상처입었고, 그리고 사랑해주면 안될 것 같은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그의 친우이자 문학적 동료였던 원재길은 기형도가 스스로의 스승을 보들레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한국의 보들레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시가 우울하긴 했지만 그것이 단순히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것도 아니요. 보들레르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우울이었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우울은 시대의 우울이자, 상처받은 양심과 청춘의 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의 시는 윤동주의 시와 닮아 있다. 오히려 기형도에게는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윤동주'로 비견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춰줄 줄 알고, 노래도 기똥차게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작곡까지 할 정도의 이 재기 넘치는 젊은 시인은 하지만 대학에서조차 교련을 배워야 했던 시대의 자식이었다.

그는 그런 시대의 우울을 몸소 견뎌야 했던 시인이다. 백혈병 초기 증세를 앓았고,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을 지경이었고, 고혈압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는 기자였다. 그의 온몸은 시대의 우울을 감지하는 촉수였고, 레이더였고, 그런 우울은 그의 정신과 육신을 상하게 했다. 이 시 <그 집 앞>을 읽으면 어쩐지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한참동안 서성이던 내 젊은 날의 사랑이 떠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