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

체자레 파베세 - 한 세대 한 세대 - 체자레 파베세 지금은 도로가 펼쳐진 초원에 소년 하나 와서 놀곤 했어. 초원에는 맨발로 즐겁게 뛰노는 개구쟁이들이 있었지. 그들과 풀밭에서 맨발이 되는 건 즐거운 일. 멀리 불빛이 켜지던 어느 날 저녁 도시에서는 총소리가 메아리쳤고, 바람결에 무서운 난리 소리가 간간이 실려 왔었어. 모두들 침묵했어. 언덕 기슭에선 바람결에 실려 온 불빛들이 점점이 흩어졌지. 밤이 깊어지자 모든 건 빛을 잃었고, 졸리움 속에 신선한 바람만이 남아 있었어. (내일 아침 소년들은 또다시 돌아다니고 아무도 난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감옥 안에는 말없는 노동자들이 있고, 누군가는 이미 죽었다. 길거리엔 핏자국들이 얼룩져 있다. 멀리 도시는 태양과 함께 잠이 깨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소년들.. 더보기
황동규 - 조그만 사랑 노래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참, 사랑이란..... 오나가나 애물단지다. 나이와 상관없고, 성별과 상관없고, 국적과 상관없이 사랑은 온천지에 공평하게 번진다. 바이러스처럼... 수많은 변종을 품은 채.... 사랑한다고 혼자서 열번만 되뇌인 뒤 처음 만난 사람을 쳐다보면 사랑에 빠지게 될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보기
정현종 - 고통의 축제.2 고통의 축제 ․ 2 - 정현종 눈 깜박이는 별빛이여 사수좌인 이 담뱃불빛의 和唱을 보아라 구호의 어둠 속 길이 우리 암호의 가락! 하늘은 새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아래로 아래로 날아오른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시간의 뿌리를 뽑으려다 제가 뿌리 뽑히는 아름슬픈 우리들 술은 우리의 정신의 화려한 형용사 눈동자마다 깊이 망향가 고여 있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무슨 힘이 우리를 살게 하냐구요? 마음의 잡동사니의 힘! 아리랑 아리랑의 청천하늘 오늘도 흐느껴 푸르르고 별도나 많은 별에 愁心내려 기죽은 영혼들 거지처럼 떠돈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몸보다 그림자가 더 무거워 머리 숙이고 가는 길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세.. 더보기
황지우 - 길 길 - 황지우 (黃芝雨)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나는 문학을 오랫동안 벗삼아 살아왔다고 감히 자평하고 싶은 인간 중 하나이지만, 여적 외우는 시가 없다. 물론 정현종 시인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정도는 염치불구하고 빼놓아야하지만, 대학 다닐 때 어느 문학평론가가 강의하는 강의에서 자신이 외울 수 있는 시 한 편을 암기해서 적어내는 쪽지 시험이 있었다. 미리 예정된 시험이었으므로 나는 한.. 더보기
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성년(成年)의 비밀 - 마종기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출처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 이 시 은 에 실린 시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오늘날 우리가 '번지 점프'라고 일종의 레저 스포츠 삼아 하는 놀이의 유래가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과 담력을 부족민들에게 보증하기 위해 3.. 더보기
오규원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 내일을 말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 더보기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사랑이란 게 함께 초코렛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공원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이나 헤아려 보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함께 백화점에 가서 사주지도 못할 물건이나마 맘껏 구경하다가 지하식품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사서 나눠먹고 웃으며 돌아올 수 있는 일이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 더보기
김지하 - 새벽 두시 새벽 두시 - 김지하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 나에게는 한 권의 오래된 시집이 있다. 조태일의 국토라는 시집이다. 1975년 5월 20일 인쇄, 1975년 5월 25일 발행이라는 판권에 적힌 세월만큼 낡고 시들해진 시집이다. 책값은 600원. 거기에 적힌 창작과 비평사의 전화번호는 국번이 두 자리다. 장난삼아 조태일이라는 시인의 고명한 이름을 "좆털"이라 불렀던...아,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그의 시 후기.. 더보기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 더보기
김수영 - 말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