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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박영근 -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또 왈칵왈칵하게 만들어 버린다.
잘 쉬고 계시냐고 시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그곳에선 부디 편안하시라고...
삶이 그토록 쓸쓸했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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