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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대추리의 평화를 궁금해하는 결이에게...

이렇게 공개되길 원치 않을 수도 있었는데 바람구두 아저씨가 임의로 공개해버려 미안하단 말을 먼저 전합니다. 이미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문, 어쩌면 이미 판에 박힌 결론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시선과 달리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그대의 질문이 주는 함의가 크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결이가 궁금해하는 그 문제, 어찌보면 원천적인 의문일 수 있는 궁금함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보아도 좋을 만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가 보내온 쪽지를 공개하였고, 제 답신이랄 수 있는 이 글도 공개하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답글을 읽기 전에 이미 망명지의 여러분들이 남겨준 글들을 통해 나름의 고민과 의문들을 해결했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군요. 제가 학교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고, 그런 점들은 어떤 의미에선 참 다행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후반 무렵엔 교실에서건 밖에서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안들,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키는 것만으로도, 혹은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에 문제가 될 법한 시집이나 소설, 역사책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도 학생부실에 끌려가서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뜻을 결집하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 나아가는 일, 어떤 문제에 대해 정부나 지배계급이 전하는 지식 이외의 다른 지식을 갖고자 하는 일, 그 첫 출발점은 늘 사람들이 모여서 지혜를 모으는 일로부터 시작되니까요. 그래서 국민이 주인인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유신헌법은 이런 자유를 부정했습니다. 이른바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인 조치를 통해서 거리 혹은 학교에서조차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법으로 처벌했던 시대이지요.


사실 결이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저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결이가 알고 싶어하는 첫 번째 이야기이자 어쩌면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랄 수 있는 첫 번째 의문으로부터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평택 미군 기지를 확장 이전하겠다는 계획은 한반도를 미국의 전쟁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인 데 그러면 왜 우리 군은(군이 제일 먼저 반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군 기지화 작업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의문이었죠. 


국가란 절대적인 존재인가?


결이의 질문은 참 올바른 상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적이라는 것은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교육받고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하게 접해온 수준이란 뜻이며,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좀더 잘 알고, 제대로 알기 위해선 좀더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미군 기지 건설 문제와 거기에 우리 군,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정부와 국방부가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가란 문제를 알기 위해선 먼저 군의 목적, 존재 이유에 대해 알아야 할 겁니다. 지난 94년 이래 우리 군의 국방목표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군의 존재 의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라고들 하지요.


군대(military power)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듯 군대가 다른 폭력집단(예를 들어 산적이나 해적, 용병 등)과 다른 것은 이들의 존재가, 그리고 이들이 행사하는 폭력의 정당성이 국가에 속해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목에서 먼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한반도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 이래 이 땅에는 많은 국가 체제들이 만들어졌고, 또 소멸되었습니다. 고조선부터 구한말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많은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고대 국가체제는 부족 국가 이후 비로소 등장한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근대국가체제라는 것이 시작된 것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을 기점으로 삼아도 110여년이 약간 지났을 뿐입니다. 즉, 국가는 영토나 그곳에 머물며 사는 사람들과 달리 영구적인 것이 아니란 겁니다. 또한 군대 역시 역사적으로 매시기 충성의 대상이 달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존재했던 국가 체제는 전제 왕정이었기 때문에 당시 존재했던 군대는 국민에 충성하는 집단이 아니라 전제군주인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얼마 전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것이 비교적 잘 드러난 대목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했던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두 집단은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했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안식처를 ‘인간의 도시’나 ‘땅 위의 도시’(즉, 국가)에서 찾지 말고 신의 도시, 즉 우주적이고 초월적 가치의 국가에서 찾으라고 조언(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덧붙여 “그러나 당분간 우리는 양쪽의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과 역사에서 국가와 전쟁, 그리고 부당함의 회색빛 그늘 속에서 순수성을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신의 도시를 알기는 하되 ‘때’가 되기 전에 마치 우리가 완전히 그 도시의 시민인양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신국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는 성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국가와 해적집단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겁니다.


국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국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과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흔히 국가이성(國家理性, reason of state)이란 말로 국가에 대해 설명하곤 합니다. 국가이성이란 말의 내용은 국가는 국가의 생존 강화라는 목적을 위해 국가권력이 법이나 도덕·종교보다도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고, 국가는 이와 같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이성은 이런 권력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 높은 목적 합리성을 인정받습니다. 또한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국가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말이 조금 어려울 듯 해서 다시 조금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SF영화에 간혹 등장하는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슈퍼컴퓨터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대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슈퍼컴퓨터는 마치 로봇처럼 나름의 규칙 - Three Laws of Robotics,  1.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되고, 게으름을 피워 인간이 해를 입도록 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첫 번째 법칙과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 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간혹 슈퍼컴퓨터가 작동 오류를 일으키거나 너무 위험해서 과학자나 기술자 같은 사람들이 컴퓨터의 작동을 중지시키거나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시도할 때, 슈퍼컴퓨터가 이런 행위를 마치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판단해 도리어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았을 겁니다. 이 때 슈퍼컴퓨터를 국가로, 이를 바로잡으려는 과학자나 기술자를 정부 정책에 대해 시위하는 시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목적 합리적 행위란 것은 국가의 생존강화를 목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경우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궁극적, 또는 최선의 목적을 수정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 합리적 행위, 목적 합리성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요구, 순수에 몰입하게 되는 위험에 제동을 거는 현실적인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이런 목적 합리성이 타락하게 되면, 애초에 국가가 만들어진 그 목적 자체보다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 도구, 기술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기술합리성 또는 도구적 합리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래 목적을 망각하고 수단에만 집착하게 되거나 기구를 온존시키기 위해 본래의 목적을 해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사례로 나치 독일 치하에서의 경찰이나 군대, 법률 등(알튀세르 같은 철학자는 이를 ‘억압적 국가장치 RSA’라고 말합니다.)이 국민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단순히 나치 독일의 사례만은 아니고 현재 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생각되는 서구의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도 발생했던 일입니다. 독일의 사례를 많이 드는 까닭은 그만큼 독일의 사례가 극적이었고, 전쟁을 일으켜 나치 독일이 단죄되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종종 소련을 비롯한 동구의 구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종종 그 사례로 인용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독일의 경찰과 군대, 법률 기관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한 인간을, 일가족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가스실로 보내면서도 이것이 국가의 명령, 상부의 명령이므로 아무런 의심없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충실히 따랐습니다. 어째서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일들이 아무런 고민 없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현대 국가 체제에서 국민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흔히 공무원이라는 관료들에게 있습니다. 국가공무원, 경찰공무원, 직업군인, 교육공무원, 행정, 사법 관료들이 바로 그들이죠. 과거보다 매우 복잡해진 사회구조 때문에 현대의 권력은 더이상 왕의 선언이나 작은 민회에서 직접 토론, 의회에서의 토론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일상생활 곳곳에 이르기까지 행정이란 이름을 빌어 집행되고, 행사됩니다. 이번 평택 대추리에서 행해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과 철조망 설치도 겉으로는 “행정대집행”이란 이름을 빌어 진행되었습니다.


이렇듯 관료제는 군사 영역과 시민 영역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베버(M. Weber)에 따르면 현대의 고위 관리들조차도 '관직'을 위해 투쟁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출세와 승진이겠지요. 관료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대의 사회구조는 매우 복잡해졌고, 자본주의는 예측가능한 정책과 안정적인 행정서비스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관료제란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매우 충실한 파트너 역할을 합니다. 관리들이 우리의 모든 일상적 욕구와 문제를 결정합니다. 관료는 공식적인 채용(공채), 전문 훈련과 분업, 고정된 관할 영역, 문서에 의한 절차와 서열에 따른 하위직과 상급직에 따른 업무의 분할 등으로 매우 효율적인 행정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때때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인간미(양심에 따른 판단을 비롯해 인간적인 융통성 등)를 결여하기 쉽습니다. 또 관료제란 제도와 조직은 마치 스스로 작은 국가인양 스스로의 조직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늘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먼저 판단하려는 경향을 가집니다. 


군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관료조직 가운데 하나이며, 군대란 관료조직 역시 스스로의 조직논리를 추구합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시민적인 행정 관리와 군 명령권자인 장교는 모두 관료주의적인 집단이란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경찰, 군대, 법률은 인간적인 양심과 판단을 내리는 대신, 관료로서 조직의 명령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관료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화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조밀하게 통제하고 있는 관료적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 1980년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감행했던 것을 비판받아 왔던 우리 군대가 평택에서 또다시 민간인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할 수 있었고, 과거 권위주의 독재 권력이 권력을 장악해 있던 시절부터 바로 얼마 전 농민 2명의 죽음을 불러왔던 폭력진압 문제를 반성해야 할 경찰이 또다시 그런 폭력진압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민주국가의 헤게모니 추출도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현대 대부분의 국가는 정치체제로서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국가들은 단순히 억압적 국가장치들만을 통해 국민을 통치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던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달리 국민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국가(혹은 지배계급)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르도록 통제하는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를 활용한다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사회적 제도들을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언론, 영화, TV, 광고를 비롯해서 학교, 교회 혹은 그 밖에 여러 가지 이유로 접하게 되는 각종 소규모 단체를 비롯해 일상적으로 매일 접하게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학교에서 매일같이 접하는 선생님의 훈화 말씀도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국가(혹은 지배계급)은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해 상징조작, 매스컴에 의한 대중조작, 선전이나 홍보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 맞는 선택을 하기 보다는 국가(혹은 지배계급)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따르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앞서 저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독재체제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함께 지혜를 모으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체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좀더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막지 않는 대신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좀더 복잡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방식을 동원합니다.(이런 방식으로 국가나 지배계급의 논리를 별다른 고민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것도 일종의 세뇌인 거죠.) 바로 그것은 이번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이전문제와 같은 사안에서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 독도 문제는 많은 친구들이 알고 있지만, 평택 문제에 대해서는 친구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같은 나라의 한 지역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행되어 가는 심각한 사건,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안보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이런 문제를 보다 잘 보이는 메인 화면에 배치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걸까요? 대추리에 군 병력이 투입되었을 무렵인 5월 5일 어린이날 공중쇼를 보이다가 추락해 사망한 공군 조종사 이야기를(물론 저는 이 분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메인 화면에 넣고, 마지막까지 조종간을 놓치 않았음을, 어린 아들이 헌화하고,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자세히 보여주면서도 군이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힘들게 지은 대추리 분교에 진입해 강제 진압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과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 것이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게모르게 우리는 선택된 것을 우선하여 보도록 유도받고 있고, 어쩌면 스스로 자발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 자신의 삶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사건보다 그렇지 않은 다른 사건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지도 모릅니다.


필요악인 국가와 시민의 계약


앞서 국가와 국가이성이란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아마 학교에서 국가의 3요소란 것에 대해 배웠을 겁니다. 근대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 중 어느 하나만 빠지더라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많은 이들이 종종 망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국가가 존립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현대국가체제에서 국가(혹은 군대)가 충성(忠誠)을 바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국민입니다. 어째서 국민인가? 그 이유는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서 한반도에 명멸했던 여러 국가들에 대해 말했는데 전제왕정 국가에서의 권력은 모두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당연히 왕에게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충성이란 국가가 아닌 국민에 대한 충성이고, 국민은 각각의 시민권을 지닌 개인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회계약론(로크, 흡스, 루소 등)’이라고 합니다. 사회계약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의 자유주의에서 온 말로 전제왕정에 저항하는 시민(부르주아지)들은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만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좀더 합리적으로 누리기 위해(시민의 최소한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서) 국가라는 개인의 자유와는 상반된 존재를 필요악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민들 개개인은 모두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위탁하고, 복종하는 대신 국가는 시민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켜준다는 내용의 계약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원론적인 것으로 들어갔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 개개인은 역사 이래로 투쟁해 획득한 시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대립하고, 타협한다는 것, 그러나 국가(와 지배계급)는 이런 시민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 만들기와 한국전쟁


어째서 국가(군대)는 평택 대추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국민)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조치를 취하며, 군대를 동원해 강제 집행하는 걸까요?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잘 아다 시피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를 통해 국가 주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회복한 국권을 통해 수립한 국가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전 새롭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 선택해서 구입한 물건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자신이 선택한 학교가 아니라 추첨방식에 의해 어느 학교 소속 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그 학교에 대해 처음부터 정을 가지고 있기는 어렵습니다. 처음 입학한 학교는 여러 가지로 낯설고, 자신이 아직 그 고등학교의 학생이란 사실이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 배정을 받고,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소풍과 수학여행도 가고, 또 우리 학교 출신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려운 일을 해나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로 입학한 학교의 학생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과정을 거쳐 XX고등학교, @@고등학교 출신이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란 신생고등학교의 국민이 된 당시 우리 웃어른들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제 막 생긴 학교의 신입생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학교의 기풍과 전통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많은 의견을 내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 내 분위기는 매우 시끌벅적하겠지요.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분위기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잘 알다시피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이란 다른 체제를 가진 두 세력에 의해 각기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가 세워집니다. 남한은 미국이란 체제를 본받고, 미국의 이해에 따라 세워진 국가체제이고, 북한은 소련이란 체제를 본받고, 소련의 이해에 따라 세워진 국가체제입니다. 국가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이죠.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가 수립기에 있었던 여러 혼란들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해방된 나라의 국가체제를 결정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았던 것, 남북한이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분단된 국가체제를 만들게 되는 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제주4.3, 여순사건 등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대한민국이란 고등학교(국가)는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국민)들을 처벌하여 퇴학(처형)시키거나 정학(수감)을 주거나 반성문(전향)을 쓰게 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는 모범생(서북청년단 등)들을 동원해 은근히 겁을 주거나(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을 저질렀지요) 학교에서 강제로 떠나게 했습니다(단독정부 수립 움직임[분단]이 본격화되면서 남과 북에서 서로 수많은 사람들이 월북하거나 월남하게 됩니다). 앞서 어느 학교의 학생으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국가도 이와 흡사한 과정을 거쳐 국민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을 학자들은 ‘국민만들기(Nation Building)’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행해진 국민만들기 과정은 매우 혹독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남한 체제와 북한 체제가 정면 무력 승부로 나섰던 한국 전쟁이었습니다.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와 피난사회


서구의 정치사상가 중 어떤 이는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전쟁이란 혹독한 과정을 통해 국가는 국민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라는 체제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국의 지배집단으로 하여금 국가형성(state-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building)과 국가 정당성을 창출하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인(남북한)들이 보여준 태도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막 생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스스로의 학교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심정이었을 텐데, 거기에 양쪽 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면 죽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은 인간으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남한 정부는 국민을 버리고 자신들만 한강 이남으로 도망간 상황이었지요. 전쟁 당시 남한 정부는 온전한 ‘국민국가’, ‘주권국가’의 지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국가는 국민을 책임지지 않았(못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인민군에게,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국군에게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일종의 ‘건국신화’가 되었고, 국민들 내면에 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거나 혹은 이를 거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웃어른들은 전쟁이란 극한상황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해야했고,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피난(Exodus)’은 한국전쟁의 거의 모든 시기를 통해 남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을 강요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피난은 북한에 의한 ‘인민의 지배’를 긍정하는 것도, 남한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지배를 긍정한 결과이기 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한 경향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경험한 극적인 체험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안위와 일신의 보존만을 추구하는 경향, 즉 피난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야 했던 극성스러움과 극악스러움이 온존해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마치 여름 한 철 피서지에 놀러갔을 때, 앞으로 계속해서 얼굴 볼 사람들이 아니니 자신의 자리보존과 이해를 위해 타인의 불편이나 공중도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의 좀더 극적인 버전이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온 셈이란 겁니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병폐와 사회적 속성은 여전히 피난사회, 피난지에서 일신의 안위와 보존만을 따지는 것과 일치합니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국가 안보는 가장 중요한 국가 목표가 되고, 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국가라는 공동체 유지와 보존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조직은 군대 조직과 같이 되고, 국민은 군인이 되고, 국가의 법은 군대에서 통용되는 명령”과 동일시되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북한 양측의 점령 정책은 이와 같이 군사적 목적에 종속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치 행위는 곧 전투행위로 간주되어 각료회의나 민주적 대의 기구의 심의와 논의 없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 양 국가 모두에서 국가는 신(神)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적’과 ‘나’의 이분법을 강요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정한 정치 이념, 즉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도록 강요하고 사람들을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분한 다음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은 용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으로 취급한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본문 193쪽>


이렇듯 “과도하게 정치화된 전쟁 상황에서 국가의 신격화, 신앙 대상화 현상”은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반공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신앙처럼 되며, 국민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들 “국가가 표방하는 정치의 신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근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이단의 결과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거친 후 미국의 체제를 본받고, 미국에 의해 탄생했고, 미국에 의해 보전된 남한에는 국가와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국가의 통치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까지 지속되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호전성은 남한 정권을, 남한의 호전성은 북한 정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지만, 서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 상대방이 필요한 공범자들, “적대적 공범자들”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국민적 집단히스테리


다시 앞서의 이야기들과 함께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국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 개개인은 역사 이래로 투쟁해 획득한 시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대립하고, 타협한다는 것, 그러나 국가(와 지배계급)는 이런 시민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정부는 국가 형성 과정, 정부 수립 과정부터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국민의 의지보다는 미국의 의사,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무게를 두어왔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의미는 신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국가안보와 국가가 표방하는 정치적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마치 종교재판의 이단자인양 비판되고 처벌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내면화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모든 악은 단 한 마디 ‘빨갱이’로 규정됩니다. 아마 지금도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평택 대추리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마치 우리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출현한 게릴라라도 되는 양 처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정신병리학적인 집단 히스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양측 모두 차분하고 이성적인 접근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런 역사적 결과가 현재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반대 혹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민들(그들도 분명히 국가가 보호해줘야 할 국민임에도 불구하고)을 군 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몰아내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한 가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이란 국가체제를 지켜준(당시 소련과 경쟁하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한) 미국의 이해를 남한의 이해와 동일하게 판단하고, 미국의 사고, 이해, 입장을 내면화한(자신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인 양 생각하는, 또 실제로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기도 하는) 지배세력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영토에 그들이 이번엔 소련이 아닌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좀더 공격적인 군사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는 일조차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런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역할, 또한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권을 수호한다는 측면에서도 당연히 국민의 의견을 묻고 반영해야 하는데 그런 적법한 절차들을 무시하고 진행되었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의 실상에 대하여


평택기지 이전문제를 요약해보자면, 현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는 기존의 미군기지들을 통·폐합해서 현재 166만평에 달하는 평택기지를 450만평으로 확장하고, 춘천의 캠프페이지를 비롯한 전국의 미 2사단 소속 미군기지를 평택 한곳으로 모은다는 계획입니다. 정부는  오는 2008년까지 총 16개 기지를 환수하고 춘천 캠프페이지 등 3개 기지의 병력과 시설을 분산 배치해 모두 7,000억 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둔다는 입장인 거죠.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시행한 평택지원특별법에 따라서 평택기지조성비용을 전국에 분포한 미군기지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충당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주한 미군이 한반도에 머물면서 일으킨 각종 범죄는 물론, 그간 자신들이 주둔해 있던 기지의 토양을 극심하게 오염시켜서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했던 땅(22개 기지)에서는 암을 유발시키는 벤젠 등 유독성화학물질인 BTEX(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크실렌)이 지하수에 스며들어 기준치의1,830배가 검출되었습니다. 또한 정부는 비용절감과 함께 기존의 미군 기지를 매각하여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춘천 캠프페이지의 경우 지난해 3월 폐쇄된 이후 1년이 넘도록 소유권이나 부지 활용권은 고사하고 아직까지 부지매입비용 산출작업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 국방부까지 나서서 이 땅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주기보다는 자신들이 사용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지요.


언제까지 우리 땅에 우리 세금을 지불하면서 한반도의 이익과 평화보다는 미국의 이익과 미국의 세계전략에 충성하는 미군을 붙잡아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이익과 한반도의 이익이 부합되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우리의 의지에 따르는 군대가 아니라 미국의 군대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 유사시 미국은 한국 정부와 아무런 상의절차 없이도(통보만 있을 뿐) 주한미군을 이용해 인접한 국가들을 공격하거나 북한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지난 YS정권 당시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는 주변의 다른 강국들로부터 보호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공격받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공격받는 이유가 우리가 그 나라에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매우 잔인한 전쟁을 치렀고, 그때의 경험으로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미군기지를 돌려받으므로, 또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놀고 있는 미군기지를 반환하라고 시위해 왔으므로 당연히 환영할 일이 아닌가? 돌려받는 땅이 더 많으므로 도리어 이익이 아니냐고 합니다. 다음은 국방부 홍보실 브리핑 자료입니다.


○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은 한ㆍ미간의합의와 국회의 비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합법적인 국책사업입니다.
○ 이 사업은 1882년 청나라 군대의 주둔 이후 일본군, 미군으로  이어진 수도 서울 중심부의 외국군대 주둔 역사를 청산함으로써 국민적 자존심 회복차원에서 지난 88년부터 우리가 미측에 요구한 사업입니다.
○ 이후, 지난 ’90년에 한ㆍ미간에 합의한 후 일부 추진 중에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우리가 중단을 요구하였고, 03년이 되어서야 한ㆍ미 정상이 재추진키로 합의한 것입니다.
○ 이러한 합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362만평을 미측에 신규 제공하는 대신, 전국에 산재해 있는 35개 기지, 7개 훈련장 등 총 5,167만평의 미군기지를 돌려받아 순수하게 4,805만평을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그동안 서울ㆍ부산 등 도심 한복판에 있던 미군기지를 이전 및 통폐합함으로써 주민불편을 해소하고 지역개발을 촉진하는 등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현재 미군기지 이전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단체들도 당시에는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을 적극 요구하였는데, 이제 와서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이전을 반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며, 결국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 어떤 항의 시위에도 꿈쩍 않던 미군이 용산기지를 반환하는 이면엔 한국과 한국 국민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그 땅이 필요치 않게 되었고, 그 와중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방만한 형태로 군 기지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고, 그런 기지를 유지하는데 있어 기지 사용료를 받기는커녕 유지비용까지 우리 정부가 상당수 대어주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그들 자신도 불필요한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노태우 정부 때부터 협상하기 시작)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쉽게 양보하고, 굴종적 자세로 협상에 임한 탓도 크지요(미군은 지속적으로 감축될 예정이며 현재 평택의 미군기지 중 상당수는 미군의 위락시설 부지로 이용될 예정입니다). 사실 미군이 용산기지를 반환하고, 주한미군이 용산과 의정부에서 떠나 평택으로 집결하는 까닭은 대북방어 문제는 한국군에 떠맡기고, 새로운 군사전략, 주한미군의 공세적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를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기동타격군으로서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손쉽게 오가기 위해 오산비행장과 평택항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즉,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주한미군의 속성은 변화하고 있으며, 주둔이 지닌 의미는 더 이상 대북억지력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전략을 추진하고 강제하는 군사력이란 겁니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2003년 3월 16일 대북방어는 한국이 부담하고, 미군이 맡고 있던 한국 내 10대 군사임무도 2008년까지 한국군에 이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주한미군은 평택기지를 확장해서 전 세계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거점기지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간 대한민국 정부는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이나 주한미군 재배치(GPR)가 주한미군의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와 관계없다고 주장해왔지만, 지난 1월 19일 반기문 장관과 미국의 라이스 장관은 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평택 대추리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가?


“왜 정부는 미국이 요구한다고 그 땅(평택 미군기지 확장 땅)을 내놓는가? 구체적으로 그래야만 될 항복문서나 국가간 체결문서가 있는 건가? 우리정부가 안 내놓는다고 하면 안 되는가?”란 질문을 했는데, 일부의 원인은 앞서의 글에서 대략적이나마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정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오늘(5.13)자 <프레시안>에 실린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임종인 씨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재검토해야 한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협상을 잘못했고 그 다음 정부들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미국과의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산기지이전협정 제2조 5항에 따르면 "양 당사국은 이전의 시행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한 경우에는 상호 협의하고 이전계획에 필요한 조정을 가할 수 있다." 제2조 2항에는 "필요한 경우에는 양 당사국의 상호 합의에 의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전"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미 2사단 이전협정인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LPP) 개정안에도 같은 조항이 들어 있다.
주한미군은 재배치되는 것만이 아니라 대거 줄어든다. 2004년 10월 4일 주한미군은 2008년까지 1만2500명을 줄이기로 확정했다. 이렇게 되면 2008년 말 주한미군은 2만4500명이 된다. 더 줄어들 가능성도 크다. 2006년 4월 23일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의 추가감군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윌리엄 팰런 미 태평양사령관과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도 미 상하원에 그렇게 보고했다.
그런데도 주한미군 감군은 평택기지 확장 면적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3분의 1 이상 줄어드는 것은 용산기지이전협정이나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 개정안의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할 경우"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팽성지역 285만 평을 다 주지 않아도 된다.
정부는 발상을 바꿔야 한다. 군사정권이 쓰던 강압적인 방법이나 공안사건으로 몰아서는 평택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국민의 반대여론을 미국과의 재협상에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의 재협상은 근거도 충분하고 논리도 부족함이 없다.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나는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과 감축 규모를 고려할 때 285만 평의 절반만 제공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국방부가 강제수용한 땅에는 주한미군의 골프장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미군이 전용하던 성남골프장(28만 평) 대체부지다. 주한미군을 위한 각종 위락시설 부지도 많다.
이런 사유들을 모두 묶어 국방부는 미국과 재협상해야 한다. 재협상을 통해, 다시는 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평택 농민들, 오갈 데 없는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걱정하는 국민들의 염려도 덜어야 한다. 정부는 강제수용을 중단하고 생존과 평화를 바라는 평택 주민과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분의 글 말고도 사실 이와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그것도 올해 중으로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문제 역시 우리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태도이고, 최근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에 대해 국익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롯해, 효순, 미선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광화문 촛불집회를 싸잡아 비난하거나, 평택 대추리 문제를 같은 시민 된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마치 반미 집단의 일인 양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한 정부가 미국과 당당하게 맞서며 우리의 진정한 국익을 위해 관철시키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앞서 나름대로 길게 늘어놓긴 했으나 그와 같은 분석만으로 해소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사안도 아니지요. 우리 국익을 위해서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저는 일면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유럽이든, 일본이든 혹은 미국이 견제하고자 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미국의 힘이 강성하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과 마찬가지로 일면의 진실일 뿐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그늘 아래 한반도가 평화로울 거라는 환상처럼 단지 일면의 진실에만 집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그 어떤 강대국도 100년, 200년의 영화를 지속하지 못했다는 진리와 함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의 국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평택 대추리,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를 생각해볼 때


어쨌거나 앞서부터 지루하게 끌어온 이야기들의 결론을 이제 내야 할 때인 듯싶습니다.
평택 문제는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 첫째. 국가는 개인, 시민에게 무엇인가? 둘째. 미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셋째. 국익이란 이름 아래 자국의 국가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혼동하거나 일치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고민거리에 대해 일부는 앞서의 글에서 제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서 보여드렸다고 생각하고, 이전의 글들을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현재 평택의 주민들이 벌이는 시위를 땅값을 좀더 보상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있습니다. 기실 이런 시각은 정부와 언론에서 부추긴 측면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방부의 대언론 브리핑 자료를 보면 “반대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추리 및 도두리 지역의 보상금은 평균 6억원 수준, 이중 보상금 총액 10억원 이상이 21명, 팽성대책위 주요 핵심 간부들의 보상금 최고 액수는 27억 9천만원, 지도부의 평균 보상금은 19억 2천만 원에 이르는 등 사실상 백만장자가 생존권 위협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일부분에서는 이전의 주장들과 달리 최근의 언론이나 여론의 동향을 살펴보면 이제 평택 주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분리해서 바라보려고 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평택 주민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동정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평택 문제를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치부하고 스스로 양심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평택 주민들을 타자(他者)화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정부의 발표대로 이들이 정말 땅 부자이고, 정말 그 정도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이 모두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까요? 또 이 분들 가운데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자기의 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을 과연 우리 정부는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이 사실은 이들과 그다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분들이란 사실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닐 겁니다.


3년이 넘는 주민들의 투쟁 과정 속에서 한·미 두 나라 정부가 평택의 주민들과 진지하게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끈질기게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을 이어가는지,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단지 특별법을 만들고, 땅을 뺏고, 농민들을 감옥에 가두고, 정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겠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죠.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89번지에 사는 오정순(59)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도 고생을 해가지고 지금은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안 좋아요. 그래서 지금은 일을 못해요. 새벽에 다섯 시부터 일어나 애들 셋 데리고 나가서 일 할라고 생각해봐요. 들판에다 다라 속에 애들 놓고 그렇게 일하면서 빨랫줄에 빨래 마를 날이 없었어요. 밤 열두 시까지 빨래하고 그 이튿날 일 나갔어요.
지금 이렇게 앉아서 생각하면 이 몸뚱이 다 망가지도록까지 일한 거예요. 그러니 이 땅에 애착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어디 가서 살라고 이걸 내놓으라고 하느냐고. 그리고 지네들이 미국놈들한테 전쟁마당 제공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원통한 거여. 우리가 어떻게 가꾼 땅인데 이 땅을 달라 그러냐고요. 우리는 진짜 못 나가. 이 땅 가져가려면은 우리들을 다 동네에다 묻고 가져가야 돼.
우리 동네는 지금 아무 걱정할 게 없어. 미군기지만 안 들어온다면은. 노인양반들 여기서 사는 데 아무 불편 없고. 여기는 소작농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어디 가서 사느냐고. 이제 나이 60~70 먹었는디 다른 데 가면은 어디 소작논 주어요? 지난번에 국방부 사람이 그러는 거야. “직장 해주면 되지 않느냐” 해서, “당신네들 60~70 먹은 노인네들 갖다가 직장 줄라느냐”고, “돈 얼마썩 줄라고 직장 얘기하느냐”고 그러니까 답변을 않더라고.

농촌에 산다고, 우리가 세금 잘 내고 거시기하니깐 정부에서 우리를 너무 깜본 거여.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어 우리 농민들한테. 우리 농민들을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거야. 텔레비전도 보지만 농촌 사람들 사기쳐서 붙잡혀가는 거 봤어요? 우리는 법이 뭔지도 몰라요. 우리가 그렇게 어렵게 살 때 지덜이 와서 치다보기를 했나 도와주기를 했나 물 한 모금을 떠다줬나. 그런 것도 아닌데 지네들은 법 찾고. 우리가 법을 어긴 적이 있가니?
애들이, 학생들이 데모하고 그럴 때에, “아 쟤네들 왜 저래여. 부모들이 저거 갈키느라고 얼마나 욕보고 그랬는데 왜 저렇게 맨날 투쟁을 하나” 그랬거든. 그런데 우리가 당하고 보니까, 그 학생들도 그렇게 생겨서나 그렇게 투쟁을 했는가 보다 하지.


평택으로 기지 확장 이전한다면서 정부가 한 일은 편지 하나 달랑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국방부 브리핑 자료를 살펴보면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모처럼 조성된 대화의 물꼬를 국방부가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2년여 동안 반대 대책위 주민들과 공식ㆍ비공식 대화를 38회”나 해왔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와 대화를 나누려 했던 것일까요. 국방부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이끌고 있는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와 평택 주민들의 모임인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팽성 대책위)에 전화조차 걸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에 국방부는 협의매수에는 응하지 않으면서 범대위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관망파’를 대화상대로 골랐습니다. 이 분들은 국방부 관계자와 만나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이고 온건한 요구였겠지요. 지난 2005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인권상황 실태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개발사업지역 세입자 등 주거빈곤층 주거권 보장 개선방안을 위한 실태조사’를 보면 “국가가 진행하는 사업으로 주민들의 생활 여건이 이전보다 나빠져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는 데, 국방부는 관망파 농민들을 설득하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국방부는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은 한․미간의 합의와 국회의 비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합법적인 국책사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책사업이란 대부분이 정부가 밀실에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짜고, 그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식이었지요. 부안에 핵폐기장을 만들  때도 그랬고, 천성산 터널 공사도 그랬고, 새만금도 그랬지요. 정말 그곳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일부 전문가들, 관료들, 정치인들끼리 결정한 뒤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평택시 팽성읍에는 대추리가 두 곳 있다고 합니다. 50년 전 주민들이 살았던 대추리는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없어졌고, 주민들은 쫓겨난 후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대추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지요. 하지만 주민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해 미군 부대 안의 옛 마을 자리를 '원 대추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2006년 이 곳의 주민들은 또 다시 대추리라는 이름을 잃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 평택 대추리엔 농촌이면 어디에나 있는 마을을 상징하는 큰 나무가 없다고 합니다. 일정 시대 때 쫓겨나고, 미군 공군기지 조성되면서 다시 추방당하듯 쫓겨난 사란들이 갯벌을 메워가며 이를 악물고 농사지어서 50년 세월을 거친 분들입니다. 이제 겨우 살만 해지니까, 다시 땅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대추분교 이야기는 전해 들어서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어느 분이 잘 써 논 글이 있어서 다시 인용해 봅니다.


거기에 학교가 없었어. 3Km 떨어진 계성초교로 통학했대. 원래 뻘밭이었으니 애들이 길 다니기가 원체 힘들어야지. 대추리/도두리 사람들, 그전에도 땅 뺏기고 온 사람들이니 살림 어려운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 와중에 주민들이 쌀 걷어서 땅 사서 학교부지 만들어 교육청에 기증한 거야. 학교 세워달라고. 1969년 3월 1일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사람들이 대추분교에 모인 이유가 그거야. 나라에서 애들 학교도 안 만들어줘서 올곧이 주민 힘으로 만든 학교. 그래서 거기 모인 거야.


사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스팔트 킨트들인 우리들이 농부들이 생각하는 땅의 소중함, 땅이 곧 생명인 분들의 감각과 생각이 생생하게 전달되긴 어려울 듯합니다. 이제 조만간 FTA란 광풍이 또다시 밀어닥칠 것이고, 우리네 농촌엔 다시 한 번 살벌한 폭풍이 들이닥치겠지요. 물론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경제 규모, 산업적 측면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미미합니다. 아마 순전히 산업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자면 FTA가 꼭 우리에게 손실만 입히진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FTA로 이득을 얻을 사람들이 그 이득을 FTA로 손실을 입게 될 사람들을 위해 혹은 국가가 거둬들인 이들을 위해 부의 분배를 이뤄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엔 돈이나 가치, 효율이란 것만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들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이들은 현재의 시위문화(폭력시위)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저도 평화시위, 시위문화를 지지합니다만, 더 큰 폭력(국가폭력, 공권력에 의한 폭력)에는 눈을 내리 감으면서도 그에 비해서는 강도가 훨씬 약한 시위 도중의 폭력에 대해서는 질겁하며 그 사람들을 이 땅에서 내몰아야 할 것처럼 야단입니다. 언제나 길 위에서 우리들과 함께 해주시는 문정현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끝으로 이 글을 줄일까 합니다.


미군기지 확장 문제는 대단한 이슈입니다. 누가 봐도 미군의 군사전략 아닌가요. 신속한 기동력, 정밀한 타격 아닌가요. 전략적 유연성이란 말을 하지만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이라는 게 눈에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화약고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의 재산권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권까지 빼앗기는 것 아닌가요. 팽성읍 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지를 반대하기 전에 평화를 사랑하는 운동입니다. 지금은 평택주민들의 시련으로 비치고 있지만 이는 한반도 평화가 달린 문제입니다. 여태껏 팽성읍 내부에서 논의하고 결속력을 다졌다면 이제 세상에 널리 알려서 '우리 일'로 만들어야 할 때인 겁니다. 이 싸움에서 진다고 생각해봐요. 한미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종속될 겁니다. 지금의 시련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데 세상은 평택 언저리 작은 마을의 외침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순박한 주민들이 짊어지고 갈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후에는 모두가 같이 짊어지자는 겁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면 조금씩 나눠지자는 말입니다.


이제, 저는 그 짐을 조금 나눠지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갑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0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