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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얘들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


호주와 일본의 월드컵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사이트 첫 화면에 속보라며 황라열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탄핵 절차가 진행 중이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호주 축구팀이 경기 종료 7분여를 남겨놓고 3대 1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구 중계를 보지 않아도 주택가의 떠들썩한 소음을 통해 히딩크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축구 결과가 인터넷에 올라올 즈음 황라열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탄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라열의 깜짝 등장과 몰락을 지켜보면서 “타카후미 호리에(堀江貴文)”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IMF와 마찬가지로 장기 침체를 경험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호리에몽”이란 별명이 더 익숙한 호리에 사장은 영웅이었다. 호리에 사장은 도쿄대학을 중퇴한 뒤 자본금 600만 엔으로 설립한 벤처기업 라이브도어를 7,300억 엔 규모의 대그룹으로 키워냈다. 그는 넘치는 아이디어와 열정, 추진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의 연금술을 펼쳐보였다. 호리에몽은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으면서 300억 짜리 전용기를 구입하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속성으로 승부를 걸었던 조급한 행보는 결국 주가조작과 분식결산이라는 위법 행위로 마무리되었고,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호리에몽은 “서둘러 산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 4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황라열은 비운동권 출신인데다 이미 탈퇴한 한총련을 다시 탈퇴하는 해프닝을 벌여 일부 언론의 구미를 맞춰주는 센스까지 두루 갖춘 스타 학생회장이었다. 그에게는 우리들, 우리 시대가 선망해 마지않을 많은 요소들이 있었다. 단순히 서울대 학생회장이란 프리미엄을 말고도 인디밴드 가수, 백댄서, DJ, 온라인게임 업체 사장, 무에타이 선수, 사운드 디자이너, 고려대 의예과 합격, 모 주간지 수습기자 등등 요사이 청소년들이라면 한 가지쯤 경험하고픈 이력들을 다채롭게 섭렵했다. 최소한 본인의 주장이 그러했고, 그 가운데 몇몇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결국 탄핵에 이르렀다.

이미 너무 많이 이야기된 황우석의 경우는 호리에몽과 달리 국익과 겸손한 미소를 무기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역시 호리에몽이나 황라열 못지않은 미디어 활용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극대화한 인물이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소유한 21세기형 핵심 인재, 즉 미디어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황라열이 언론을 겨냥해 계산된 해프닝들을 벌인 것처럼 사람들은 호리에몽을 가리켜 걸어 다니는 ‘선전탑’이라 불렀다. 황우석 역시 미디어를 겨냥해 “월화수목금금”과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유와 결과는 어찌되었든 이 세 사람은 각각 위법 행위와 거짓으로 인해 자신들이 누리던 대중적 명예와 영광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지난 12일 일본 릿쿄(立敎)대학의 경영, 경제, 사회학부 재학생 7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내놓은 ‘존경하는 기업인 조사'에서 마쓰시타 고노스케, 손정의, 빌 게이츠에 이어 호리에는 4위에 뽑혔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국익을 위해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다. 황라열의 탄핵이 운동권 학생들에 의한 조직적인 비운동권 학생회장 죽이기란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어째서 잘못이 잘못으로 단죄되지 않고,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형을 오랫동안 피난사회의 그것으로 강제했다면, IMF 경제위기는 지상최고의 목표를 돈, 부자 되기로 규정지었다. 최근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TV광고는 미인선발대회를 코믹하게 엮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는 평범한 소감에 이어 한 참가자가 말한다. “47%는 주가지수연동정기예금에, 48%는 환매조건부 채권에 투자하며 5%는 부족한 제 미모에 조금 더 투자하겠습니다.” 그러나 TV판 말고 인터넷판 광고에는 좀더 긴 뒷이야기가 있다. 사회자가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더 이야기해보라고 하자, 참가자는 “얘들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고 너무나 당당하게 말한다.

오래전부터 누구나 부자를 꿈꿔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부자는 제대로 된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부자는 누구나 선망하고, 가장 성취하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염치 불구한 부자 되기 열망은 영어조기교육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어릴 적 경제교육이 부자 되기 첫걸음’이라거나 ‘책 속에 부자 되는 길이 있다’는 무분별한 경제교육동화들과 경제조기교육바람을 불러왔다. 어린이들로 하여금 인간 존재와 사회에 대해 성찰해보기도 전에 마케팅 담론을 서둘러 내면화시키고,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너무 서둘러 살아가고 있다. 나는 새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들이 만들어낼 미래가 벌써부터 두렵다.

<200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