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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내 친구 이스크라의 1주기를 기리며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 폴 엘뤼아르(Paul Eluard)

엘뤼아르는 친구 "장 아르프"를 애도하며 <이 땅에 살기 위하여>란 시를 썼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 친구, 이스크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제 2005년 7월 3일 밤 7시 57분 낯모르는 이로부터
"이창진 씨를 아시는 분이면 연락주세요. 사고가 생겼습니다."란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는 잠시동안 망설여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알 수 없었으므로...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네 소식을 들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는 그 순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었다. 머리속이 하옇게 탈색되어버린 느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니. 그때 너는 이수호 선생이 계신 신일고등학교 문예반이었지. 서울지역 문예반 학생들을 모아 네가 있던 신일고가 중심이 되어 백일장을 했었다. 그때, 아마 내가 산문부 장원을 했을 거다. 상품으로 송기숙 선생의 "자랏골의 비가"를 주었지. 솔직히 우스웠어. 고등학생들끼리 모여서 지네들끼리 대회 열고, 또 지네들끼리 상품주고, 잘 했다고 박수해주고... 그래, 백일장은 아마 우리들이 은밀하게 모이기 위한 핑계였을 거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농민가"에 맞춰 네 박자춤을 배우고, "돼지 불알"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낯을 익혔었지. 그렇게 우리들은 1987년의 그날을 위해 서로 낯을 익힌 걸 게야.

그리고 1987년의 5월과 6월을 거리에서, 다시 10월과 11월을 물밑에서 우리는 교육민주화와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국대에서, 연세대에서 밤늦은 시간 학생회 건물로 스며들어 서로 다투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렇게 각자의 12월을 준비했다.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 백일장으로 시작해 여기저기서 모인 고등학생들이 4.19 이후 단절되었던 최초의 고등학생운동조직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냈던 순간이었다. 선거권이 없었던 우리는 "비판적 지지", "후보단일화", "민중후보" 그 어느 것에도 참가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1987년 12월 우리는 "교육민주화와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외치며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란 이름으로 벌인 최초의 싸움이었다.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민주정의당 후보 노태우가 8,282,738표, 36.6%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선이 악에게 패하던 날이었다. 최루탄 범벅이 되어 구로구청 현장에서 달려온 선배의 몸을 얼싸안고 우린 울었다. 우리의 싸움은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고, 몇몇은 성당으로 달려온 부모 형제의 손으로 끌려나갔다. 민교협 선생님 몇 분이 찾아오셔서 부끄러운 듯 빵값을 놓고 가셨고, 우리는 그 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밤이면 성당을 몰래 빠져나와 서울 곳곳에 전단을 뿌리고 다녔다.

외로웠다. 마치 1980년 광주에 고립된 그 날의 시민들처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우리의 외침을...

광주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학살의 원흉들은 12.12를 성공리에 마무리 지은 뒤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엔 군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 입고 떡시루를 나눴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배들이 사분오열했던 1987년의 그날. 우리는 손쉽게 승리를 생각했었나 보다. 아니, 우리의 비장함과 상관없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고돌아 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만 그 사실을 몰랐나 보다. 1987년 12월 24일 명동성당 농성을 풀면서 우리는 작은 양초 하나씩을 들고 침묵으로 명동성당을 나섰다. 채 100m도 되지 않는 명동성당 계단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비장했던가? 아니면 비참했던가?

때마침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엔 눈이 내렸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목도리와 털장갑, 그리고 무관심으로 무장한 연인들이 다정하게 걸어갔다. 구세군은 자선남비 종을 울리고, 그렇게... 1987년이 저물어갔다.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지긋지긋한 괴롭힙이 기다리던... 학교 담장 안에서 선생은 우리를 때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사찰 대상이었다. 시위가 있다는 정보가 뜨면 한밤중까지 학생주임실에 잡혀 있어야 했던 1988년. 몇몇은 대학 대신에 현장을 택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는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으로 확대개편되었으나 결과는 지리멸렬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천안의 공단으로, 너는 또 어딘가로 우리들은 그렇게 뿔뿔이 헤어졌다. 그곳에서 "강철통신"을 처음 접했고, 베를린 장벽 개방 소식을 들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네 집에 전화를 넣어 너의 안부를 물었다. 그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1991년 5월 내 고등학교 후배 세용이가 분신했단 소식을 들었다. 같은 해 8월 19일 모스크바에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공산당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불발로 끝났다. 나는 서울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며 날품팔이로 살았다. 그해 12월 후기대 시험지 도난 사건이 있었고, 다음해로 미뤄진 전문대학 시험을 치른 나는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내가 네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겐지, 내가 흘려버린 세월들을 애도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너와 나의 마주섬과 엇갈림, 그리고 이제 영영 마주대하지 못할 시간들을....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 나는 슬펐다. 87년 대선으로부터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냉소만이 그 시절들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으므로. 그 시절의 명망가들이 침묵하거나 변절하는 동안, 참을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나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7년여를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인천까지 떠내려왔다. 나중에 널 만나고서야 알았던 일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지척에 두고 살았더구나. 너는 공단에서 비합법조직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인천에서 지역문화운동이랍시고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음에도 흥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한겨레>신문에 실린 원철이 기사를 읽었다.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 활동을 했던 정원철이라고 신문에 그렇게 녀석의 기사가 있었다. 경실련에서 일하고 있었더구나.  

그래도 우리 얘들이 다들, 그때 지녔던 꿈의 일부나마 포기하지 않고,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반가왔다. 원철이에게 또 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대가 이곳 문망에 처음 나타났던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3년 전이었던가. 13년만이었다. 우리가 헤어진 채로 살아왔던 13년... 너는 예전의 낯빛, 그 목소리, 그 착한 눈빛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났었지. 신포동 뒷골목 고깃집에서 소주 잔을 앞에 두고 밀린 이야기들을 나눌 때도 때늦은 진눈깨비 내렸었지. 그날처럼... 우리는 그 때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었다. 조직이 깨지고 나서 오랫동안 몸도, 마음도 고생해야 했던 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편하게 살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는 도리어 날 위로했었다.

지난 세월, 언제나 내 마음의 빚이자 빛이었던 벗, 이스크라! 내 친구 창진!
험난했구나, 우리가 보낸 세월들이...
내색할 순 없었지만 네가 많이 아팠고, 아팠다는 이야기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혁명은 가고, 일상만 남아버린 순간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至難한 것인지...
너는 이곳 문화망명지에도 네 흔적을 많이 남겨 놓았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부를 전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을 널 알기에... 매 주일마다 문자메시지를 날려주던... 행복하라, 행복하라, 행복하라던 난 그 메시지들에 과연 일일이 응답해주었던가. 오랫동안 마음속의 빚처럼 널 생각해왔으면서도 막상 그대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우리의 무거웠던 과거가 다시 살아나는 듯 해서 부담이었던 건 아니었는지.

네가 정치조직을 떠나 방황하던 9년... "이제 간신히 식어버렸던 애정이, 잃어버린 순수가(감히)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하던 너는 왜 말이 없는 거냐. "살아간다는 것, 숨 쉰다는 것, 참 소중한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수한 길이 그 위에 있다"던 너는, "중요한 것은 살았으나 죽은 자가 아니라 진정 살아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던 너는, "진지하게 진실하게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일, 기쁜 일에 진정 기뻐하고, 슬픈 일에 가슴을 저미며 슬퍼하고, 불의를 보면 충분히 분노하되 냉철한 이성으로 맞설 줄 알고, 아름다움에 푹 빠질 줄 알고, 진리를 향해 열정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의지를 사모하고, 마음을 다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던 너는 어디로 간거냐.

그랬던 거냐. 지난 2003년 3월의 어느 날. 네가 남겼던 그 말처럼 "지금도 전 저의 이생의 삶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몸을 던져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작게 평가하고 살아가지는 않지요. 우리의 생명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요.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다는 것이 눈물나도록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라던 ...

'이 세상에 나하나 오고 가는 일...참으로 덧없어라..'

이라크 어린이들이 누워있는 병실 사진을 보며... 너는 ...

그렇구나.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욕심 때문에,
변명꺼리가 많은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에,
생업에 지친 우리들의 연약함 때문애,
너희들이 죽어가는 구나.
우리들의 꿈과 미래가 산산히 무너져 내리는 구나.

온 마음으로
내핏줄을 잃는 아픔으로
내안의 육체가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너희들을 보내고 싶다.

부디 또다른 세상에 가서는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모든 부요함으로 꽉꽉 채워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간절히 기도하마.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또다른 너희들에게
동일한, 처절한 현실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서 몸부림치며 살기를 다짐해 본다.

우리들의 다짐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현실의 무수한 난관에 부딪쳐
원하지 않는 형식으로 , 외식으로, 가식으로 그치지 않게
분투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련.

언젠가는 우리가 대면할 날이 오겠지.
눈과 눈이 마주하고,
손과 손이, 가슴과 가슴이 맞대어질 날 오겠지.
그때 우리 다함께
기쁨으로 노래하길 소원해 본다.

잘가거라. 내 마음들아!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제 나로 하여금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게 하다니... 나쁜 자식!

너 또한 너보다 먼저 가버린 운혁이 만나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겠구나.
벗이여!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잘 가거라, 나의 87년이여!
잘 가거라, 내 어린 날의 열망이여!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리운, 그리워 할 내 벗이여! 동지여!

Misereatur nostri omnipotens Deus,
et dimissis peccatis nostris, perducat nos ad vitam aeternam.
Amen.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 이 글은 1년 전 친구의 죽음을 추모하며 썼던 글입니다.

<200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