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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문화를 공부하는 이유 - 시대의 책문(策文)에 답하기 위해

문화를 공부하는 이유 - 시대의 책문(策文)에 답하기 위해



제가 어째서 뒤늦다면 뒤늦게 문화라는 공안(公案)을 쥐고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일까요?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최종 관문을 일컫는 말이 “책문(策文)”이라고 합니다. 과거 급제의 최종 시험인 책문은 말 그대로 당대의 현안과 고민에 대해 이제 막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젊은 인재들에게 최고통치자가 직접 정책대안을 제시하라고 묻는 시험을 말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당대의 고민에 대해 최고통치자가 이제 막 출사표를 던진 젊은 도학자에게 직접 그 정책 대안을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와 달리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최고 통치자는 시민이라 불리든, 대중이라 불리든 또 어떻게 불리든 다수의 개인이 최고통치자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비들, 지식인들은 왕이라는 한 명의 최고통치자만을 설득하면 되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수십만, 수백만의 대중을 상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해야 합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를 묻는 광해군에게 임숙영이란 선비는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라고 답하여 왕의 진노를 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스로 피지배계급이면서, 대중이고, 시민이면서 동시에 최고통치자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주인일까요? 유가적 관념에 따르면 현실은 천하의 도리를 실현하는 장소이고, 정치는 그와 같은 도리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천하만물, 즉 자연(自然)이라고 부릅니다. 자연은 한자어 그 자체의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 스스로 연유를 묻지 않는 체제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았으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이고, 우리는 이를 가리켜 문화라고 부릅니다.

자연이 사람과 만물을 만들고, 우리는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문화를 창조하는 행위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바로 도(道,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기에 대중문화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저항력과 지배계급 사이의 통합력 사이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투쟁의 장(battle ground)이며, 이 시대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공동체)의 문화란 이와 같은 투쟁과 타협이 서로 타협적 평형(compromise equilibrium)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최고통치자의 책문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 시대의 문화라는 전장 앞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미력하나마 그와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한 사회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성원들 사이에 비전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비전이란 미래를 상상하는 힘과 그와 같은 미래를 만들어야하는 타당성, 그리고 실천력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공동체 구성원간의 비전이 공유되지 못할 때, 정치가들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공동체는 같은 침상 위에서 다른 꿈을 꾸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같은 민족공동체 혹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지배계급)이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입장과 이해를 관철시키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와 같은 사회시스템을 전복시키지 못했고, 어떤 때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저 편

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저 편에서 세상이 다른 방식으로 구획되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 자연적인 방식으로 보일 뿐더러 그 사회에 속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지배체제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동의하게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저는 그것이 바로 문화(지식, 이데올로기, 예술, 교육, 매스미디어 등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의 힘이자 기능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동의하고 있는 대중의, 사회의 문화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저항력과 지배계급의 통합력 사이에서 펼쳐진 투쟁의 장(battle ground)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배계급의 통합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일상의 문화(혹은 이데올로기 투쟁)란 공간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비록 장준혁이 좀더 인기가 있더라도 무조건 장준혁 편을 들 수 없는 것, 드라마를 보면서 가족과 나누는 대화에서 장준혁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는 것, 최도영이 어째서 현실성이 없는 캐릭터 설정인지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우리를 훈육하려 드는 지배계급의 문화와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알려주려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우리는 때로 그 논리에 동의하지만, 때로는 거부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매일 같이 노출되는 드라마와 뉴스, 신문, 잡지, 광고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싸우거나 복종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매일 무엇이 옳은지, 또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교육을 통해서도, 매스미디어를 통해서도, 혹은 우리들의 부모 세대가 지닌 가치관을 배우는 가정에서도 우리는 매일 그와 같은 문화를 배우고 익히거나 때로 저항합니다. 최근 보수와 진보가 사이버공간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련의 힘겨루기나 역사학계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기억투쟁이나, 부모문화와 충돌하는 청년문화, 지배문화와 충돌하는 하위문화 역시 대중에 대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전의 계몽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우리 사회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착취구조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혹은 계급구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변하리라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경제적 토대에 따른 계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이와 같은 경제결정론, 계급결정론으로는 사람들의 실제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신화적 세계관,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당하다는 과학적 논리를 가장한 사회진화론, 지배계급이 누리는 문화는 우아하고, 고상하며 노동대중이 누리는 문화는 천한 것이라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분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이 오랫동안 너무나 자연스러웠게 작동했기에 어떤 여성도 이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죠.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세상이야말로 의심해보아야 하는 세상인 것처럼 우리 주변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는 많은 일들, 이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업의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해야 하고, 무한경쟁의 세계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의 유연화가 필연적이며, 우리가 21세기에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발맞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혹은 세뇌하고 있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의 밖을 상상해내야 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저녁에 잠들 때까지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수많은 지식들을 흡수합니다. 그 중에서 일부는 선택하고, 일부는 버림받지만 거의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는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시사저널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자본에 대한 경미한 비판조차 원천적으로 봉쇄당합니다. 삼성과 인척 관계에 있는 중앙일보의 홍석현 전 사장이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유야무야 없어졌습니다. 국회청문회에서는 이건희를 증인으로 부르는 일 자체를 포기했고, 이를 보도한 기자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1987년 이후 수립된 민주주의 체제, 민주화란 말로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민주화 이후의 모든 민주주의는 민주화란 말로 일원화되어 간단히 국가에 의해 기념되고, 국가에 의해 포상되고, 국가에 의해 포장되어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80년대의 운동은 단순히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체제민주화인사란 말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반체제는 단순히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고, 이것이 반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은 망각되었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적당히 잊고 싶어 할 무렵, 그나마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회주의의 일제 몰락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단일한 체제, 자본주의라는 유일 체제 속에 포섭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그래서 네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건 그때의 공산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반인류적이지 않는 한, 저는 다른 체제를 끊임없이 상상할 것이고, 그와 같은 상상을 가로막는 현재의 문화에 대항하여 망명할 겁니다.

그것이 제가 문화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경구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은 드러난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Le monde ce n’est pas ce que non voyez.)"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있는 한 드러난 것과 다른 내용을 가진 세상의 이면을 들춰보려는 노력을 할 겁니다. 그리고 설령 제 생명이 다하더라도 이와 같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누군가는 끊임없이 이 체제에 도전하리라 낙관합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은 어느 순간에 우리는 인류 스스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한 체제를 만들어 내리라 믿습니다. 제가 우리의 삶, 일상의 매순간이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의 일부분이라고 믿는 까닭이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