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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사랑한 뒤엔...



사랑한 뒤엔 한여름 꽃가슴에도 멍이 남는다


시인 고은의 짤막한 시 중에서 단 두 줄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이 몇 편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래의 시인데요.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


어제 제가 만드는 잡지의 편집주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막판 교정을 마치고 교정지를 필름출력소로 보내놓고 두 사람이 함께 국밥집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편집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선생이란 호칭일 겁니다. 어떤 경우엔 선생이라 부르는 것에 부아가 날 만큼 형편없는 글을 보내놓고 나 몰라라 하는 필자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제 경우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집자입니다.

사실 이번호 잡지 기획을 하면서 적지 않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 부사수로 들어온 친구에게 87년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마치 제게 80년 광주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87년은 또 그와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겪은 87년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로 분류되기 보다는 민주화 이후 세대로 분류되는 것이 적당할 겁니다. 다만, 그 나이 또래에서 흔히 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다는 것이 저를 저의 동년배 세대와는 약간 다른 세대로 분류하게 만들 수는 있겠습니다. 만약 연령별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세대별 분류로 하자면 오히려 저는 "경대 친구들"이라고 불리웠던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학번 세대에 가깝습니다.(저는 아직도 이렇게 학번으로 구분하는 세대론에 대해 일정한 반감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몸담고 있는 잡지의 편집위원들 세대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의 가장 앞선 학번대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긴급조치 세대, 긴조세대라고 약칭하여 불리는 70년대 말 학번에서 80년대 초 학번에 이르는 세대니까요. 이들에게 광주는 그 이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바로 79년 서울의 봄 때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바로 그들이기도 하지요. 이들이 바로 그 자신도 속한 한홍구 선생의 대한민국사 4권에 나오는 계엄군이 밀려오는 서울대 한 편에서 누군가 한 명은 남아 계엄군에게 빈 학교를 넘겨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유시민과 같은 세대입니다.

제가 87년 이후 97년에 이르는 제법 긴 시간대를 냉소로 보냈다는 고백은 이전부터 참 많이도 해왔습니다. 때로 인터넷으로 만나는 인연이란 비슷한 성장사를 공유하지 못할 뿐더러 매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혹은 발작적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저는 문화망명지의 여기저기에 저의 축적된 고통과 반성을 흩뿌려놓았음에도 사람들은 그걸 그다지 열심히 읽어주지 않거든요. 나의 글이 불임환자의 정액 처럼 열매 맺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가끔 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매번 절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혹은 저의 생각을 읽도록 붙잡아두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까닭은 그나마 이것이 살아남은 제가 밥값을 하는 몫이라고 생각에서 입니다.

살아오면서 나름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었겠으나 매 순간 더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저를 질책하며 먼저 간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쓰려곤 합니다. 문득, 저 시를 다시 읽노라니 왈칵하는 기분이 들어 이런 글을 씁니다. 필름교정을 보고 인쇄로 넘어간 책은 편집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죠. 몇 달에 걸쳐 전력을 다해 사귀고, 가꾼 나무 한 그루, 혹은 병아리 한 쌍을 시장 좌판에 내보내는 기분이 듭니다. 매일같이 이별하는 일간지가 있고, 매주 이별하는 주간지나 월간지의 편집자들의 기분이 이보다 진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귀는 시간으로 치자면 계간지 편집자가 가장 긴 연애기간을 가질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잡지는 어느새 다음호 특집 기획을 완료했고, 필자 선정을 끝마쳤으며 일부 특집 관련 원고에 대해서는 원고청탁까지 완료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있을 편집회의에서는 가을호 특집 기획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이미 주제는 정해졌고, 세부 항목을 짜기로 되어 있지요. 이제 설 지나서 발간되는 책은 2007년 봄호이지만 저는 벌써 2007년 가을을 살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와 같은 짓거리를 해온지도 다가오는 5월이면 어느새 만 11년째가 됩니다.  얼마전 TV드라마 "하얀 거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가 TV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제게 "남자들은 그냥 드라마 본다고 해도 될 것을 꼭 마누라 핑계를 대더라"면서 절 힐난 하더군요. 그런 거야 사실 제가 변명하는 것보다는 제 집사람에게 물어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문화망명지를 오랫동안 지켜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제 집 사람은 이곳에 글을 남기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참견을 안 하는 편이지만, 이곳에 오르는 글들, 남편이 어딘가에 쓰는 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는 것 같습니다. 대개 아내에게 한 마디 참견을 들을 때는 제가 뭔가 과도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약간 넘쳤다고 생각이 들 때입니다. 좋은 얘기는 거의 안 해주지만 아내가 지적해주는 과실은 거의 다 옳은 말들이라 제가 별로 변명할 거리가 없어요. 하여간 농담 삼아 제가  “TV홈쇼핑에 등장하는 여성 속옷 판매 프로그램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지. 특히 "언더웨어의 패션 트렌드 경향에 대한 학문적 일고찰"이란 연구논문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24시간을 사는데, 저라고 해서 없는 시간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교정보고 돌아와도 잠들기 전에는 책 한 줄이라도 봐야 하루를 산 것 같은 사람에게(잘난 척?) TV드라마는 종종 사치입니다. 대학원에서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대중문화영역에서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케이블TV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그다지 열심히 보진 않습니다. 가끔 외국산 드라마가 국내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수용될까? 어째서 저런 드라마, 리얼리티 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가하는 것에 대해 관심은 생기지만 제가 실제로 천착하기엔 밥벌이에도 목을 메야 하는 제 삶이 너무 빠듯합니다.

앞서 책 읽기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마감 전 마지막 교정을 보고 돌아왔는데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그날 잠시 짬을 내서 헌책방에 들러 사 온 판타지라이브러리 백과사전 "천사"편 한 권을 다 떼고 누웠습니다. 그리고 알라딘 서재와 망명지에 올릴 책 리뷰『대장정 - 세상을 뒤흔든 368일』을 쓰다가 원고지 매수로 환산해보니 어느새 대략 40여 쪽 분량을 썼더군요. 사실 이 책은 자본주의화 이후 중국공산당이 특히 신경 쓰는 부분, 사회계급분화에 따른 계급간 격차가 점차 벌어지는 것(참 아이러니죠? 사회주의 국가에서 계급 격차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을 과거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봉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사람은 그와 같이 빤히 보이는 속내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평가면에서는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공산당사, 중국혁명사와 함께 천천히 다시 읽기를 하면서 이번엔 제법 느릿느릿한 리뷰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같이 듣는 핀잔 중 하나가 돈도 안 되는, 이와 같은 글쓰기인데 사실 청탁받아 쓰는 글보다 제게는 이와 같은 글이 훨씬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이와 같이 돈이 되지 않는 행위, 노동과 분리되지 않는 유희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터넷상으로 몸담고 있는 두 개의 주된 공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와 알라딘의 “바람소리 쓸쓸한 서재, 풍소헌”이 제게는 그와 같은 공간입니다. 알라딘 서점은 이유야 어쨌든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기도 하고, 제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게도 된다는 점에선 역시 제 메인 무대는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입니다.

하여튼 지난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엔 "황해문화"에 실릴 권두언을 썼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쓰게 되는 원고가 권두언인데, 마감에 맞추기 위해 미리 판을 다 짜놓은 상태라 제가 써야 하는 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획에 대한 편집위원회의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짤막한 권두에세이 포함해 원고매수를 절대로 35매 이상 넘길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다 쓰고 보니 34.9매로 정확하게 맞춰서 쓰긴 썼더군요.(언제나 하고픈 말로 넘치는 사람이지만, 프로 글쟁이는 정해준 매수를 정확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제 철칙이기도 합니다.) 부사수 녀석을 너무 잘 단란시켜 놔서 제가 마감에 늦으면 절 잡아먹을 듯 협박하여 저 역시 마감 기일을 간신히 맞추긴 했습니다. 오늘 아침 필름교정을 보러 나가기 전에 각 신문사 문화부, 학술 담당 기자들에게 이 메일로 보도자료와 함께 특집 원고, 기획 원고 파일을 보내주었습니다. 덕분에 필름 교정보는 내내 담당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리긴 했는데, 과연 몇몇 신문에서, 그리고 과연 몇몇 기자가 이번호가 담은 속내를 잘 짚어줄지 약간 걱정도 됩니다.

나이들어 친구사귀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 경우엔 늘그막에 무슨 복인지 요 근래 갑작스레 친해진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바흐친 책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더니 홀연히 나타나 제게 자기가 대학생 시절 읽었던, 지금은 정말 구하기 힘들어진 바흐친 책들을 보내준 저랑 동갑내기 친구도 있고, 한 1년 쯤 전 저에게 갑자기 재발견된 대학 후배도 있습니다. 지난 겨울 갑자기 제게 말을 걸어와서 그전엔 잘 모르다가 이제 막 알게 된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형이 돈에 팔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겨서 형이 삼성의 광고 카피를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이해해주겠노라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미 12년 쯤 전 그러니까 삼성의 이건희 회장께서 “마누라와 자식 말고 전부 다 바꾸라”고 큰 소리 치던 시절에 삼성 광고 카피(TV광고는 아니고)를 쓴 적이 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팬북을 만든 적도 있는데, 제가 팬북을 만들던 무렵에 이승엽 선수는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했었을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책을 만든 적도 있지만, 주로 상대했던 기업은 한보그룹이었습니다. 그 무렵엔 제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인사말도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잡았던 직장이 작은 규모였지만 나름 알짜배기 출판광고기획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던 거지요. 그러다가 수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고, 때마침 7년여를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일도 생겨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인천으로 내려와 지금의 잡지 편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3년 정도 의욕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폐인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자본과 인간, 자본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끝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기 보다는 당시 한보그룹이 수서비리로 세무조사 등을 당하게 되면서 덩달아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 결국 그만두게 된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삼성이나 한보그룹의 카피를 써줄 일은 없겠지요. 어쨌거나 이곳에 와서도 한동안 냉소적인 저 자신을 벗어나진 못했었지만, 지금의 잡지에서 좋은 사람들, 좋아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이나 혹은 어린애 같이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치기로 벌이는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반항은 제법 많이 털어냈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제 자신도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인 편집주간과 함께 국밥을 먹으며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번 권두언의 내용이 본의 아니게 편집주간의 글과 논지가 상당히 유사해졌더군요. 두 사람이 이번 기획을 하면서 87년이 혁명이다, 아니다를 놓고 서로 약간의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제 부사수에게 왜 나는 87년을 혁명이라고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획과정에 본의 아니게 강의 비슷한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68이 혁명이라면 87이 혁명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제 입장이었고, 저 자신에게도 87을, 혹은 87에 이르는 과정과 그 이후 20년 동안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은 혁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편집주간 역시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음에도 공연히 시비를 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더군요. 잡지를 만들면서 서로 일정하게 뜻이 어긋나고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 딴에는 이 부분에 대해 괜히 심각해져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견해가 너무 많이 틀어지면 일하기 힘든데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김 주간의 글을 다 읽고 나서 혼자 흐뭇했다는 것이 제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사실 이번 호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호는 무척이나 애착이 갑니다. 기획도 기획이려니와 제 나름대로 한 번은 꼭 정리해야 하는 것을 정리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제 나름으로 87년 혁명은 제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사건이 제 인생의 행로를 결정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국밥을 먹으며 당신의 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개인적으로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수줍게 고백했습니다. 하긴 김 주간은 저와 어느덧 8년여 이상을 함께 해오고 있어서 이 덩치 좋고, 때로는 깡패 같고, 때로는 감시견 같은 편집장의 수줍음을 아직은 잘 이해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고통스러운 고백과 성찰이 나에겐 그가 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내밀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재확인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냉소로 가득 찬 지식인만큼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글을 쓰는 자는 세상에 드뭅니다. 그와 같은 점에서 저는 김명인 같은, 머리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비애(파토스)"를 지니고 살아가는 지식인을 동지적으로 사랑합니다. 어쩐지 이와 같은 공개적인 애정고백이 저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중요한 건 제가 여전히 덩치가 좋고, 깡패 같고, 감시견 같은 작자라는 것이지요.

알량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내며 말이 참 길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누구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는 그 미안함을 언제나 품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미안함의 일단을 그나마 덜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그대도 제 곁을 떠나 또 어디론가 간다 하더군요. 세상을 살면서 제가 가장 많은 이별을 하는 자는 아니겠지만, 늘 보내는 일이 서툽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버리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의 상처처럼 품고 사는 모양입니다. 부디, 잘 다녀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