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세 번째 편지
-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미완의 시대에….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해 보니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가 도착해 있더군요. 아는 어떤 사람에게 떼써서 얻어낸 책입니다. 어제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기자 세 사람, 학자 한 명, 그리고 이 책 "미완의 시대"를 보내준 친구 한 명을 만나서 '히레사께'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누군가 바람구두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는데, 경험적으로 알게 된 진실 가운데 한 가지는 최소한 저란 사람이 저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원근법의 마술은 참으로 대단해서 멀리서 보면 훌륭하지만, 가까이에서 알게 되고, 보고 있노라면 실망하기도 그만큼 쉽지요. 사실 죽어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비겁해요.
죽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변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변명하는 건 더 그렇지요. 죽어버린 사람도 계속 변하기 마련이죠. 죽은 사람이 변화한다는 건, 낙엽이 썩어가는 것처럼 사체의 내장에 고인 물이 썩고, 살을 녹이고, 뼈가 삭는 과정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역사의 평가 속에서 변화해간다는 거죠. 하여간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참 많아요. 제가 실망할 기회는 그만큼 앞으로도 지대하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에릭 홉스봄'입니다. 미술과 (고전)음악 분야를 제외하고, 문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 제가 좋아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영국 혹은 대영도서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물들이 많다는 건 영어를 잘 못하는 제 입장에선 아쉬움이 많은 영역이긴 하죠.
예를 들어 칼 마르크스, 아르놀트 하우저, 에릭 홉스봄, 토머스 모어, 아담 스미스,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즈, 조나단 스위프트, 레이몬드 윌리엄즈와 최근의 스튜어트 홀에 이르기까지(또 앞으로 이곳 문화망명지에서 다루게 될 수많은 예술가들을 포함해서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인물들은 아주 많지요.) 저와 상성이 잘 맞고, 제가 많이 배운 인물들 가운데 그렇게 영국쪽 인사들이 많습니다. 뭐 영국에 대한 제 짝사랑을 표현하려는 건 아니고…. 어떤 이들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일 수도 있어요.
이곳이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는 건…. 제 나름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여간 어떤 이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많이 알게 될수록 실망할 가능성이 많이 커지게 되고, 자꾸만 스스로에 대해서도 반추하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도망가고, 빠져나갈 변명거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건 제가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다는 건데, 그건 아마도 인문학적인 교육의 결과물일 수 있을 겁니다. 정작 역사는 기억하지 않지만 스스로는 늘 역사라는 별로 공정하지 않은 잣대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거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들국화의 "제발"이란 곡입니다. "제발 그만해둬. 나는 너의 인형이 아니잖니~"라고 시작하는 노래인데요. 들국화의 노래 중에서 이 곡 "제발"과 "사랑일 뿐이야" 두 곡을 참말로 좋아합니다.
누군가 날 안다는 거,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거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바로 그 누군가 날 좋아하고, 알아준다는 일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도 없을 겁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기에 실망시킬 수 없으므로 더 가혹해지는 거지요. 차라리 처음부터 악연이었고,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면 기왕지사 그리 찍혔으니까 문제가 없는데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든 좋으니 인정받고 싶고, 칭찬 듣고 싶어 했던 제 천성이란 게 있었고, 그것이 저의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염천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얻어먹지 못했던 비루한 개처럼 목이 말랐거든요. 저란 사람의 어린 시절이 드러내놓고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님에도 가끔 오래된 앨범의 먼지를 털어주듯 스스로 되돌아보는 일을 반복합니다. 기억이란 갈고 닦아주지 않으면 영영 잊게 되는데 굳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기억들을 반복 회상하는 건 그것이 저란 사람의 실체이고, 그것을 잊지 않아야 제가 지금 얻게 된 알량한 이름값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란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개밥의 도토리"였어요. 참, 우습죠. 이제 막 10살로 올라서는 9살 어린 소년에게 서른아홉에서 마흔 살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할 운명을 지닌 아버지가 들려주는 마지막 말이 "넌 개밥의 도토리"라니... 일찌감치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은 누이와 친척에게 얹혀살게 되었으니 그 처지야 "개밥의 도토리"만도 못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도 아버지가 그 순간 꼭 그렇게 말씀해야만 했을까 곰곰이 반추해보곤 합니다.
사람도 아닌 개 밥 그릇에 담긴 도토리 한 알….
도토리 한 알의 생각은 때로 개 밥 그릇의 세상을 넘어 대한민국이기도 하고, 세계이기도 하고, 우주를 생각하기도 해요. 그러다 문득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좁쌀 한 알'의 세계관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이야기에 제 나름의 해설을 덧댈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 수 있는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반칠환 시인의 시, 지구는 제비꽃 한 송이를 위한 화분이란 표현처럼...
요 얼마간 머리가 참 복잡했고, 실제로도 짐을 덜고자 시작한 일이 도리어 짐이 되어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은 너무 가벼워서 이렇게 저렇게 무거운 짐들로 눌러놓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지요. 이 글을 보면서 제 두툼한 몸피를 떠올리고 실소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습니다.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를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전반부 몇 부분이 제 시선을 끌더군요.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게릴라'라는 말은 세계 변혁의 열쇠로 인식되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체 게바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하나같이 젊었고 덥수룩한 머리에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유럽전역을 휩쓸었던 1848년 혁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피델 카스트로 같은 혁명가들은 새로운 정치적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온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일부러 멋있게 차려입힌 사람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을 읽노라니 1960년대 서구세계를 구원한 것은 궁극적으로 제3세계 인민들의 투쟁, 혁명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 제3세계의 인민들은 서구의 내부에서 흘러나온 여러 철학들, 계몽주의, 사회주의, 낭만주의, 자유주의 등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시 제1세계를 구원한 것이죠. 혁명에 대한 가능성, 혁명에 대한 희망만으로도 제1세계의 민중과 지식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다시 구원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으니까요. 물론 이와 같은 혁명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은 1980년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다시 멱살을 잡힙니다. 보수주의 혁명이 그것이죠. 우리에게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가 그러한 것처럼 영국 사회에서 대처 집권 기간은 이와 같은 변화된 보수주의, 자본주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을 질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변화시킨 시대였습니다.
제가 에릭 홉스봄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럼에도 그가 섣불리 절망이나 희망을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인데요. 루쉰이 어느 헝가리 시인의 말을 인용해 우리에게도 널리 퍼진 말….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란 말처럼 저에겐 절망도, 희망도 뭔가 종료된, 정지시킨 사람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평생 미완의 시대를 살아가지요. 죽음이 우리 삶을 강제로 멈추지 않는 한 생은 계속되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이 끝나더라도 또다른 좁쌀 한 알, 개밥의 도토리는 또 어디선가 살아가겠지요.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적 억압 상황을 인식한 지식인들은 종종 민중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믿음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민중에게 아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가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파농의 비판이 지닌 타당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지식인이란 혹은 모든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절망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존재겠지요. 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미완의 삶을 누군가는 이어줄 것이라고 믿는 마음에서 세상이 존재해왔다고 믿습니다.
원래 이런 글을 쓰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안너 빌스마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를 연이어 듣노라니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습니다.
때로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은 그 유령이 이승에 미련을 두고 떠나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는 거라는…. 바람구두라는 어떤 문화망명자가 혁명의 희망도, 가능성도 사라진 시대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심장이 납덩이였다는 사실이 어렸을 때는 참 충격이었죠. 왜 하고 많은 물질 중에 납이었을까 하고요. 그것은 아마도 납이란 금속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하기엔 가장 하찮은 금속, 가장 값없는 금속이었기 때문이었겠죠. 오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은 그와 같은 하찮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자신, 이 세상에서 그 하찮은 존재들이겠지요. 유리지갑 속에 담긴 월급을 차압당하고, 회사에선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그나마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모두가 불안해 하며 살아가야 하는, 누구 하나 주목해주지 않는 개밥의 도토리이자, 좁쌀 한 알인 우리들의 그 하찮음이 실제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되고, 행복한 왕자의 납덩이 심장처럼 세상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미완의 시대에….
바람구두가
-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미완의 시대에….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해 보니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가 도착해 있더군요. 아는 어떤 사람에게 떼써서 얻어낸 책입니다. 어제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기자 세 사람, 학자 한 명, 그리고 이 책 "미완의 시대"를 보내준 친구 한 명을 만나서 '히레사께'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누군가 바람구두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는데, 경험적으로 알게 된 진실 가운데 한 가지는 최소한 저란 사람이 저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원근법의 마술은 참으로 대단해서 멀리서 보면 훌륭하지만, 가까이에서 알게 되고, 보고 있노라면 실망하기도 그만큼 쉽지요. 사실 죽어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비겁해요.
죽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변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변명하는 건 더 그렇지요. 죽어버린 사람도 계속 변하기 마련이죠. 죽은 사람이 변화한다는 건, 낙엽이 썩어가는 것처럼 사체의 내장에 고인 물이 썩고, 살을 녹이고, 뼈가 삭는 과정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역사의 평가 속에서 변화해간다는 거죠. 하여간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참 많아요. 제가 실망할 기회는 그만큼 앞으로도 지대하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에릭 홉스봄'입니다. 미술과 (고전)음악 분야를 제외하고, 문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 제가 좋아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영국 혹은 대영도서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물들이 많다는 건 영어를 잘 못하는 제 입장에선 아쉬움이 많은 영역이긴 하죠.
예를 들어 칼 마르크스, 아르놀트 하우저, 에릭 홉스봄, 토머스 모어, 아담 스미스,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즈, 조나단 스위프트, 레이몬드 윌리엄즈와 최근의 스튜어트 홀에 이르기까지(또 앞으로 이곳 문화망명지에서 다루게 될 수많은 예술가들을 포함해서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인물들은 아주 많지요.) 저와 상성이 잘 맞고, 제가 많이 배운 인물들 가운데 그렇게 영국쪽 인사들이 많습니다. 뭐 영국에 대한 제 짝사랑을 표현하려는 건 아니고…. 어떤 이들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일 수도 있어요.
이곳이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는 건…. 제 나름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여간 어떤 이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많이 알게 될수록 실망할 가능성이 많이 커지게 되고, 자꾸만 스스로에 대해서도 반추하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도망가고, 빠져나갈 변명거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건 제가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다는 건데, 그건 아마도 인문학적인 교육의 결과물일 수 있을 겁니다. 정작 역사는 기억하지 않지만 스스로는 늘 역사라는 별로 공정하지 않은 잣대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거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들국화의 "제발"이란 곡입니다. "제발 그만해둬. 나는 너의 인형이 아니잖니~"라고 시작하는 노래인데요. 들국화의 노래 중에서 이 곡 "제발"과 "사랑일 뿐이야" 두 곡을 참말로 좋아합니다.
누군가 날 안다는 거,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거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바로 그 누군가 날 좋아하고, 알아준다는 일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도 없을 겁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기에 실망시킬 수 없으므로 더 가혹해지는 거지요. 차라리 처음부터 악연이었고,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면 기왕지사 그리 찍혔으니까 문제가 없는데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든 좋으니 인정받고 싶고, 칭찬 듣고 싶어 했던 제 천성이란 게 있었고, 그것이 저의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염천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얻어먹지 못했던 비루한 개처럼 목이 말랐거든요. 저란 사람의 어린 시절이 드러내놓고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님에도 가끔 오래된 앨범의 먼지를 털어주듯 스스로 되돌아보는 일을 반복합니다. 기억이란 갈고 닦아주지 않으면 영영 잊게 되는데 굳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기억들을 반복 회상하는 건 그것이 저란 사람의 실체이고, 그것을 잊지 않아야 제가 지금 얻게 된 알량한 이름값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란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개밥의 도토리"였어요. 참, 우습죠. 이제 막 10살로 올라서는 9살 어린 소년에게 서른아홉에서 마흔 살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할 운명을 지닌 아버지가 들려주는 마지막 말이 "넌 개밥의 도토리"라니... 일찌감치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은 누이와 친척에게 얹혀살게 되었으니 그 처지야 "개밥의 도토리"만도 못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도 아버지가 그 순간 꼭 그렇게 말씀해야만 했을까 곰곰이 반추해보곤 합니다.
사람도 아닌 개 밥 그릇에 담긴 도토리 한 알….
도토리 한 알의 생각은 때로 개 밥 그릇의 세상을 넘어 대한민국이기도 하고, 세계이기도 하고, 우주를 생각하기도 해요. 그러다 문득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좁쌀 한 알'의 세계관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이야기에 제 나름의 해설을 덧댈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 수 있는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반칠환 시인의 시, 지구는 제비꽃 한 송이를 위한 화분이란 표현처럼...
요 얼마간 머리가 참 복잡했고, 실제로도 짐을 덜고자 시작한 일이 도리어 짐이 되어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은 너무 가벼워서 이렇게 저렇게 무거운 짐들로 눌러놓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지요. 이 글을 보면서 제 두툼한 몸피를 떠올리고 실소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습니다.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를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전반부 몇 부분이 제 시선을 끌더군요.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게릴라'라는 말은 세계 변혁의 열쇠로 인식되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체 게바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하나같이 젊었고 덥수룩한 머리에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유럽전역을 휩쓸었던 1848년 혁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피델 카스트로 같은 혁명가들은 새로운 정치적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온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일부러 멋있게 차려입힌 사람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을 읽노라니 1960년대 서구세계를 구원한 것은 궁극적으로 제3세계 인민들의 투쟁, 혁명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 제3세계의 인민들은 서구의 내부에서 흘러나온 여러 철학들, 계몽주의, 사회주의, 낭만주의, 자유주의 등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시 제1세계를 구원한 것이죠. 혁명에 대한 가능성, 혁명에 대한 희망만으로도 제1세계의 민중과 지식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다시 구원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으니까요. 물론 이와 같은 혁명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은 1980년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다시 멱살을 잡힙니다. 보수주의 혁명이 그것이죠. 우리에게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가 그러한 것처럼 영국 사회에서 대처 집권 기간은 이와 같은 변화된 보수주의, 자본주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을 질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변화시킨 시대였습니다.
제가 에릭 홉스봄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럼에도 그가 섣불리 절망이나 희망을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인데요. 루쉰이 어느 헝가리 시인의 말을 인용해 우리에게도 널리 퍼진 말….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란 말처럼 저에겐 절망도, 희망도 뭔가 종료된, 정지시킨 사람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평생 미완의 시대를 살아가지요. 죽음이 우리 삶을 강제로 멈추지 않는 한 생은 계속되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이 끝나더라도 또다른 좁쌀 한 알, 개밥의 도토리는 또 어디선가 살아가겠지요.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적 억압 상황을 인식한 지식인들은 종종 민중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믿음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민중에게 아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가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파농의 비판이 지닌 타당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지식인이란 혹은 모든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절망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존재겠지요. 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미완의 삶을 누군가는 이어줄 것이라고 믿는 마음에서 세상이 존재해왔다고 믿습니다.
원래 이런 글을 쓰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안너 빌스마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를 연이어 듣노라니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습니다.
때로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은 그 유령이 이승에 미련을 두고 떠나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는 거라는…. 바람구두라는 어떤 문화망명자가 혁명의 희망도, 가능성도 사라진 시대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심장이 납덩이였다는 사실이 어렸을 때는 참 충격이었죠. 왜 하고 많은 물질 중에 납이었을까 하고요. 그것은 아마도 납이란 금속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하기엔 가장 하찮은 금속, 가장 값없는 금속이었기 때문이었겠죠. 오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은 그와 같은 하찮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자신, 이 세상에서 그 하찮은 존재들이겠지요. 유리지갑 속에 담긴 월급을 차압당하고, 회사에선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그나마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모두가 불안해 하며 살아가야 하는, 누구 하나 주목해주지 않는 개밥의 도토리이자, 좁쌀 한 알인 우리들의 그 하찮음이 실제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되고, 행복한 왕자의 납덩이 심장처럼 세상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미완의 시대에….
바람구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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