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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Res non verba

나치선전예술가 -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1900-1991, 독일)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 플로라(Flora)


아르노 브레커의 조각 <플로라>라는 작품이다. 그냥 이렇게만 보면 그저 그런 조각들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아르노 브레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나면 그저 심상하게 보일까? 아르노 브레커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을 존경했다. 그는 1943년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고향 바닐로스(Banyuls-sur-Mer)를 찾아가 그의 모습을 조각하기도 했다. 만약 이 시기가 독일과 프랑스가 평화로왔던 그런 시대였다면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조각가의 모습을 조각하는 후배 조작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 남겨진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아르노 브레커는 나치미술의 대표적인 조각가였고, 1943년이란 시점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해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의 조각가이자 판화가이며 건축가였던 아르노 브레커는 독일 앨버펠트에서 1900년 한 채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레커는 지방에서 교육을 받다가 1920-1925년에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27년부터 1933년에는 파리에 거주하였는데, 이 무렵 데스피오, 마이욜 등과 교분을 나눴다. 그후 1년간 로마에 체류하였다. 1934년 독일 베를린에 정착하여 1937년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추상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나 로마에서 본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 작품의 영향을 받아 영웅적 인물 조각과 근육이 팽팽한 거대한 전사상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으로 나치 독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아르노 브레커 - 가드(The Guard)


화가를 꿈꾸었으나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군인,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 적합한 예술가들을 선호했고, 현대미술, 추상예술 같은 분야는 유대인의 영향을 받은 더럽고, 퇴폐적인 미술로서 독일의 정신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예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자신과 나치즘의 이상적인 예술세계를 구현해줄 수 있는 예술가를 필요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의 구미에 딱 맞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와 나치당에게서 작업실(아뜰리에)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거대한 성과 그의 작업에 보조할 인부들을 제공받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을 돕는 인부들은 전쟁 포로였다.

그는 전쟁 이전부터 '독일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고, 나치 독일의 국가공인예술가에 해당하는 만큼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나치 정권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았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이처럼 나치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전쟁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나머지 작품들 역시 전후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브레커, 자신은 히틀러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경고를 받고 나머지 혐의들에 대해서는 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후 그는 미술계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50년 뒤셀도르프에 정착한 아르노 브레커는 1960년대에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는 조각가로 되돌아왔지만 비평가들 대부분은 그의 작품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페터 루트비히는 브레커를
"정치적으로 매우 편중된 슬로건 아래 그의 업적이 격하되었지만 위대한 초상화가"라고 그에 대해 변호해주려 애썼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두상을 조각하고 있는 아르노 브레커(1940)


나치 미술은 1930∼1940년대 독일 나치스가 예술가들을 나치즘에 봉사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미술 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즈음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의 파시즘을 대변한 예술이기도 하다. 나치 예술가로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루드비히 트로스트Rudwing Troost, 이보 살리거Ivo Saliger, 파울 파두아Paul M. Padua,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 베르너 파이너Werner Peiner, 아돌프 치글러Adolf Ziegler 등이 있다.

히틀러는 '확고한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단언하고 자신의 사상을 지지하는 예술을 찬양하였으며, 1935년 나치 선전 단체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미술가들에게 인종차별주의에 기본바탕을 두고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내용 또한 승리나 애국심 투쟁 혁명 등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고, 건축과 조각 등에서는 주로 신고전주의 기법이 쓰였으며, 회화에서는 노동자의 투쟁적 생활상을 강조하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를 돌아보는 히틀러와 수뇌부를 따라 함께 한 아르노 브레커

 

거대한 성 안에 만들어진 아르노 브레커의 스튜디오

나치스는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은 퇴폐적이라 규정짓고 작품을 압수, 소각하였으며 1937년 표현주의와 추상주의 미술 작품을 모아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는데 이것은 현대미술을 한꺼번에 매도하는 행위였다. 심지어는 나치스에 동조하던 에밀 놀데Emil Nolde와 같은 작가는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제작을 금지 당하였다. 반면 그 시기에 개최된 나치 아트전은 히틀러의 권력을 찬양하는 의미에서의 전시회로서 나치스 지도자들의 대단한 찬사를 받고 독일군의 영웅주의, 땅과 소작인, 아리안 남녀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나체를 찬양하고, 기념비적 건축물과 초상화들을 전시했다.

 

1937년에 개최된 '위대한독일미술전시회' 포스터

 

'위대한독일미술전시회'를 둘러보는 히틀러와 독일 선전상 괴벨스, 이탈리아 선전상 디노 알피에리(Dino Alfieri) 등


패전 후 대부분 폐기되었던 나치미술 작품은 1970년대 제3독일 제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
나면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나치미술을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나치 훈장 수집가들이 있고, 나치미술을 일반 예술사 속에 정착시키려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74∼1975년 독일을 순회하며 '제3독일 제국의 예술-억압의 기록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어 파시즘의 실상과 나치미술의 비예술성을 폭로하였고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는 1976년 런던에서 나치예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의「The Guard」, 아돌프 비셀Adolph Wissel의「Farm Family from Kahlenberg」(1939), 후베르트 란징거Hubert Lanzinger의「The Flag Bearer」, 카를 알비커Karl Albiker의「Relay Runners」등의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