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 석기용 옮김 | 이마고(2003)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역시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성공적인 수준의 독서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우리는 오랜 군사독재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인지, 한국전쟁이라는 지긋지긋한 체험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오랜 문치 시대의 문약에 젖은 탓인지 몰라도 군사 문제 혹은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향이 있다. 새 사냥꾼들이 꿩을 잡는데는 꿩의 습성을 이용한다고 한다. 꿩은 갑자기 놀라면 머리를 땅에 박고 고개를 들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자기 시야를 스스로 가림으로써 공포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습성을 이용해 사냥한다는 것이다. 전쟁 혹은 전쟁사에 대한 연구, 전쟁 기술에 대한 연구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한다 해도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0세기를 대중의 시대라고 말한다. 20세기 대중의 시대는 과연 문화와 문명에만 집중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전쟁은 비로소 대중화되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른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간에 치러졌던 100년 전쟁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치뤄진 전쟁이었다. 이토록 오랜 기간 치른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농민들은 그들의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물론 피해가 없었다는 건 아니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때의 전쟁은 선택된 전사들끼리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서구에서 기사도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프로페셔널한 직업 전사들이었고, 소수 대 소수가 치른 전쟁이었기에 전투 수행에 따른 갖가지 원칙들을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목숨을 노리기 보다는 포로로 사로잡고, 그에 대한 몸값을 치르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점차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전쟁은 소수 특수 집단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전쟁이 되었고, 전쟁은 이제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인류는 총력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잔학한 학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중세의 전쟁은 일반인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종교전쟁(30년 전쟁과 같이)만이 일반인들의 생명까지 겨냥하고 있었을 뿐이다. 즉, 전면전은 극히 적은 사례였다는 것이다. 저자 어니스트 볼크먼이 궁극적으로 무게를 두어 주장하는 것, 나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결정과 전쟁의 수행 방식(무기)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인과 군인, 과학자라 불리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으며, 일반 시민들의 관리 아래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의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그것은 과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가치이므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의 미망을 깨우친 것은 제3의 불, 바로 핵이었다. 인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전기를 통해 산업혁명을 이루었고, 오늘날의 문명을 성취했다. 기술 진보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해왔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 진보의 신화는 로스알라모스에서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원폭 실험에 성공한 뒤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깨지고 만다. 대중문화에서 소위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원폭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쇼크의 반응이었다. 이제 과학자들의 합리적 이성, 순수한 과학적 탐구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평화주의자이면서도 본의 아니게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멍에를 쓰게 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3차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제4차세계 대전에서 사용될 무기는 확실히 알수 있다. 바로 돌멩이와 몽둥이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은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전쟁을 소수 전문지식과 과학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것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는 동안 인류는 파멸의 시간에 그만큼 앞장 서 다가가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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