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 주인님께
연왕모
어젯밤 내내 비가 왔어요
빗소리와 숨소리가 뒤섞여
귀가 자꾸만 먹먹해졌고요
빗줄기에 부딪히는 날숨들이
허둥대며 가슴으로 돌아 들어왔어요
울컥 쏟아진 붉은 잉크에
편지지는 붉다가 이내 검게 변해갔고요
어둠 속에 묻혀갔어요
아침이 오니
햇빛만 마냥 밝아요
놓여 있던 것들은 모두 하얗다가
이내 떠나버렸고요
책상 위엔 먼지만 들떠 있네요
출처 : 문학과사회, 2008년 가을호(통권83호)
*
연왕모 시인의 신작시 3편이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실렸다. 시 제목이 <연애편지>인데 제목보다 “주인님께”라는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사랑에 대해서야 다종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난 가끔 연애란 건 누군가를 잠시 동안이든, 영원이든 주인으로 모시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연애편지>이지만 내용은 실연(失戀), 연인, 혹은 주인을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20세기 초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생했던 원인 중 하나를 ‘자유가 주는 부담’에서 찾았다. 봉건사회 해체 이후 주어진 자유,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대신 책임도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봉건사회의 공동체를 대신해 민족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연애는 연인을 영혼의 주인으로 받드는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는 연인에게 육체의 가장 내밀한 부분들을 함께 공유하도록 내어주고, 일상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함께 하며, 작은 행동 하나조차 연인의 마음을 최우선으로 배려하여 결정하게 된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 구속 상태에 접어들 만큼 연애는 감미롭다. 상대가 자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자발적 구속 상황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몹시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지 잠시 동안만 한 인간의 영혼을 점유할 수 있을 뿐이며 아무리 자비로운 연인도 영원히 타인을 위해 살지 못한다. 자발적 구속이 깊으면 깊을수록, 다시 말해 연애의 밀도가 짙을수록 사랑이 지속되는 기간도 반비례한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뒤의 세상은 마치 110V 전구를 220V 전류에 연결한 것 같다. 머릿속이 한동안 새하얗게 빛나다가 곧 암전(暗轉)된다. 그 열기에 제 몸이 불타오르게 될 줄 알면서도 불나방들은 불 속으로 뛰어든다. 종종 날개만 불태운 채 불 밖으로 떨어진 나방들도 있다. 제 자리만 하릴없이 맴돌아야 하는 불나방들을 바라보면 내 마음이 먹먹하게 젖어온다. ‘내가 꼭 너 같구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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