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수한 명문대학으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꼽는다. 다소 엄살을 섞어 말하자면, 요사이 이들 대학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영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유학 생활하기가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아도, 생활비가 많이 들어 힘들다더라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긴 하다. 그럼에도 이 두 대학이 대영제국 전성기의 제국 엘리트들의 산실이며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떠나 내게 이 두 대학은 다음과 같은 책들로 인해 명문대학이다. 우선 케임브리지는 개마고원에서 출판하고 있는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시리즈로 인해, 옥스포드는 옥스포드 영어 사전 및 영국사 등의 저서를 출판하는 명문 대학 출판부를 가진 대학으로써 나에게 명문대학이다.
"제프리 노웰 스미스"가 책임편집자로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저자로는 모두 80여명 가량의 세계 유수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이 참여했다. 사이먼 윈체스터의 책 "교수와 광인"을 통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권위는 전세계적으로도 절대적이다.(옥스포드 영어대사전은 약 40년 동안 학자 1000여명이 동원돼 1928년 처음 완간되었는데, 사이먼 윈체스터는 이 과정에 참여한 제임스 마리의 이야기를 통해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만들어지던 무렵의 문화와 역사를 담아 책으로 엮었다.) 내가 처음 옥스포드란 고유명사와 인연을 맺은 것도 중학교 입학하면서 삼촌이 선물해준 "옥스포드 혼비 영영한 사전"을 통해서였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명성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데, 명성이 지속될 수 있는 바탕에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측이 일년에 최소 4차례에 걸쳐 인터넷 개정판을 내는 등 매해 1,500단어 이상을 추가하는 노력에 기초한다. 이렇게 온라인 사전에 추가된 단어들은 옥스포드 출판부가 발행하는 수십 종류의 활자 사전 개정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프랑스 역시 17세기 왕립학술원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사전 작업에 착수해서 1690년대 첫번째 불어사전을 만들었고, 이후 총리 직속 기관으로 불어연구원을 두어 1960년대에는 표준불어대사전 작업에 착수하여, 1990년대 16권을 완간해냈다. 프랑스의 유명출판사인 라루스 역시 1910년 첫 불어사전을 펴낸 뒤 매년 개정판을 출판하고 있어 100회 가량의 개정판을 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터넷 확산과 함께 대형 포털 사이트들이 국어사전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온오프라인상의 모든 어휘연구작업이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최근 들어 국내의 언론사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또한 미디어로서 온라인 매체들에 밀리는 현실이고, 상대적으로 영세한 잡지 매체들 역시 경영상 매우 곤란한 처지다. 이젠 신문,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일에 대해 세금 감면 혜택이라도 주어야 할 판이다.
얘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다. 앞서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책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앞에 특별한 방점이 필요하다면 역시 옥스포드에 붙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의 영화붐을 타고 "세계영화사"란 주제로 국내에 출판된 책들은 꽤 여러 종이 되지만, 이 책은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되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신력과 품질을 인정해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국내외 매스미디어들이 이 책에 대해 보인 호들갑스러운 평가가 괜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세계영화사"에 대한 주제로 쓰인 최고의 책이다.
이쯤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외견상의 평가는 일단락짓기로 하고, 소비자로, 독자로 책을 좀더 꼼꼼이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이 책의 만듦새는 본래 영어판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독특하다. 정확하게 1.000쪽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실제 본문 내용은 판권 포함해서 997쪽으로 떨어진다. 뒤에 남는 페이지는 그냥 백지이긴 하지만, 그냥 1,000쪽이라고 해도 별무리는 없겠다. 집에 1,000쪽짜리 책 있는 사람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내가 아니고 우리 사무실에 소장된 가장 두꺼운 책은 금성출판사판 국어대사전인데 거의 3,800쪽 가량 된다.) 이렇게 두꺼운 책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반적인 단행본 제본으로 책 상태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정통적인 양장본 제본 방식인 사철 제본으로 되어 있는데, 종이를 일일이 실로 꿰맨 책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단단한 하드 커버로 마치 앨범처럼 덮개가 되어 있다.
속표지를 넘기면 책임편집자의 "감사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고, 그 뒤로 이 세계영화사(사전이라 불러도 좋으리)의 기고자들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 책의 첫번째 문제이자 관점이 튀어 나온다. 기고자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이 책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영미적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폴란드, 라트비아, 인디아, 홍콩, 일본, 러시아 필자 등이 각 1인이고, 이상하게 네덜란드 필자가 2인, 그리고 뜻밖에 프랑스 필자가 1인밖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국적이 영화사를 특별히 편협하게 기술하는 요인이 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국 영화는 자국의 필자가 가장 잘 안다고 했을 때, 프랑스 국적을 지닌 필자가 80여 명이나 되는 중에서 1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참고로 호주 영화인은 2명 참가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영미권 인사들이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 무성영화에 대한 기술은 미국의 리처드 에이블이 담당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어렵다는 거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탓할 수도 있고, 책이 재미없는 것과 유익함은 별개의 문제라고 인정한다. 앞서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이 책의 유익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책의 재미와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무미건조함이다. 대개 여러 명의 필자가 참가하는 기획서들의 일반적인 문제는 필자간의 의견 차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데 조율하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 책에선 그런 단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와 이 책의 번역자들이 공들인 덕이겠지만 이 책은 마치 한 명의 저자가 담당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일관된 톤을 지닌다. 그런데 그 일관된 톤이 사전적인 무미건조함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영화사도 일종의 예술사라는 역사라고 할 때 사관이 드러나 보여야 하는 대목이 거의 없는 덤덤함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역시 재미를 추구하는 독서란 점에선 지적해 둘 대목이다(개인적으로 영화사의 기술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평사 -혹은 비평사조- 부분이 이 책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이 책이 무려 1,000쪽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구조 자체는 매우 간단한 편이다. 모두 3장의 구성(897쪽부터 시작되는 용어설명, 참고문헌, 인명색인, 영화색인은 별도로 하고)으로 되어 있는데, 1장 "무성영화 1895 - 1930", 2장 "유성영화 1930-1960", 그리고 3장 "현대영화 1960-1995"까지의 실제로는 영화 100년사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장들은 다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반복되는데, 서론으로 각 시대의 영화사적인 특징과 얼개를 소개하고 그런 뒤에 그 시대의 특징적인 영화사적 사건에 대한 개론을 소개한다.
1장에서는 당연히 영화의 탄생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부장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 시기에 분화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코미디, 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영화 등 영화 장르를 개별적으로 다룬다. 그 뒤에 다시 각국의 영화 스타일을 각각의 필자들이 맡아서 다룬다. 1장과 2장의 영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구분점은 소리의 문제이다. 2장에서는 본격적인 유성영화 시대를 맡이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성공과 이 무렵 영화에 불어닥친 검열의 문제, 기술혁신의 문제를 특징적으로 소개한다. 그런 뒤 유성영화 시대 더욱 극적으로 분화된 영화의 장르들(뮤지컬, 서부영화, 범죄영화, 판타지 등)을 개별적으로 소개한다. 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던 이 무렵 이데올로기가 영화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고, 각국의 영화 스타일과 발전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화를 포함해서).
3장 현대영화편에서 가장 주목해볼 기술적 혁신과 영화사적 사건은 그간 유일한 동영상 매체로서 영화가 누려왔던 영광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 TV매체의 출현을 꼽는다. 서론 이후 곧바로 '텔레비전 시대의 영화' 라는 별도의 구성을 통해 텔레비전이 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분석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후의 구성인 '미국영화'편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미국영화가 매체로서 TV와 경쟁할 자원으로 삼은 것은 섹스와 선정성, 그리고 블록버스터였으니까 말이다. 이후 유럽의 예술 영화들, 미국의 독립영화가 TV출현에 대한 영화예술적 모색이란 점을 고려해 아방가르드 영화들, 시네마 베리테 등 예술영화운동을 살펴본다. 그 뒤 각국의 영화 발전을 살핀다.
이미 여러 리뷰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영화 발전을 다루고 있다. 영미권 영화(실제로는 미국 영화)는 당연히 그 중심에 있고, 그 주변부 영화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독일, 러시아, 터키, 아랍, 아프리카,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홍콩, 대만,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등을 총망라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는 별도로 다뤄지지 않았다(이렇게 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영화사가 기술되면 상대적으로 예술의 주체인 창작자들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편저자들 역시 그 점을 고민한 듯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랭 들롱과 같이 유명 영화 감독과 배우를 포함해서 미술감독, 촬영감독에 이르는 각각의 영화 종사자들을 모두 132명 소개하는 것으로 보충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인물들이 많았다).
지금 한국영화가 누리고 있는 영광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996년의 일이란 점(과 1995년까지만 다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게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최소한 서구인들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 영화의 출현은 21세기적 사건이지, 20세기의 사건은 아닐 테니 말이다.
* 본래 하드커버로 먼저 출판되었는데 보급본으로 새로 나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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