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붉은 별(상.하)』 - 에드가 스노우 | 홍수원 옮김 | 두레(1995)
"에드가 스노우 vs 존 리드, 아그네스 스메들리 vs 님 웨일즈" 이렇게 구도를 만들어 놓고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에드가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 존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위대한 길 : 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님 웨일즈는 『아리랑』을 쓴 작가들이자 저널리스트들이다. 만약 그렇게 살 수만 있었다면 이들을 위한 길 앞잡이 노릇을 하다 만주 벌판 어딘가에서 비적(匪賊)의 납탄을 맞고 죽었어도 나로서는 별로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위와 같은 대비 말고 또 다른 대비를 시도해보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vs 서머셋 몸, 앙드레 말로 vs 마르크 블로크, 잭 런던 vs 조지 오웰'의 대비를 살펴보면 이 또한 역시 상당히 재미있는 대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헤밍웨이와 몸은 아마추어 스파이 활동 경험이 있는 작가란 공통점이 있고, 앙드레 말로와 역사학자 블로크는 레지스탕스 활동의 공통점을, 잭 런던과 조지 오웰은 각각 르뽀 작가로 활동했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잭 런던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조선에 온 적도 있었고(비록 조선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조지 오웰과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는 각각 스페인 시민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도 있다. 서머셋 몸은 스파이 시절을 회고하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지만 혁명기에 러시아에 머물던 그의 스파이 활동은 스파이라기보다는 산보객에 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셋을 따로 구분하여 각각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는 역사만을, 철학자는 철학만으로, 문학하는 이는 문학만을 자기 영역으로 생각하고, 간혹 이를 초월해버리는 사람을 능멸하는 경향까지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지식 풍토 속에서 서구식 작가(writer, author)의 개념은 작가(novelist)로 한정되고 만다.
게다가 우리는 작가들의 지위나 권위에 대해 픽션이 지닌 권위의 절반만큼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작품 활동만 하는 화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화가인 사람, 순수하게 음악활동만 하는 성악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는 성악가 같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더 존경받는 경향과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일과 직접 창조하는 일이 동일한 성질의 일이라면 애써 세분할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와 동양의 몇몇 나라에 한정된 경향일 뿐이다.
▶ 옌안에서 마오와 함께 한 에드
가 스노우
텍스트의 권위가 텍스트 자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텍스트 생산자의 사회적 권위에 의존하는 사회의 텍스트들은 처량맞다.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명확한 금긋기 행위가 사실은 비문학적 행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문학평론가들은 문학만 말하고, 영화평론가는 영화만 말하는 건, 좋게 생각하면 전문성을 좀더 강화시키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는 암암리에 지식인 사회의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참고로 보들레르는 미술비평을, 아도르노는 음악비평을 했으며, 발터 벤야민이 계속 살아남았다면 영화비평을 했을 거다.)
나는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거의 십여 번 이상 읽었다. 중국혁명사를 공부하기 위해? 마오주의자라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천만에 말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마오쩌뚱이 즐겨 읽었다는 수호지만큼이나 호방한 재미가 있고, 미문(美文)의 틀에 갇힌 모호함 대신 살아 날뛰는 현장의 소리가 들려오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보다 감동적이다. 이런 감동이 주는 힘은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진실의 힘이다. 우리는 한 인간의 눈으로 대신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을 전달받고 있다. 비록 그것이 과거의 어느날이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살았으며 그네들이 이상과 희망에 따라 상처받았고, 굶주렸고, 슬퍼했으며 때로 절망으로 의지를 잃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안다. 그것이 진실이 주는 힘이다.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 말이다.
가끔 역사 드라마를 보면 역사를 소재로 한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실감하게 될 때가 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라면 그가 설령 일본 자객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받더라도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안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 혁명 지도부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장정이란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겪지만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한다. 그런 사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 ‘장정’이란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의 ‘공농홍군’(工農紅軍,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이 국민당 정부의 포위 토벌공격을 피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 근거지를 버리고 10여개 성을 지나 1936년 10월 중국 서북 산베이(陝北)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2만5000㎞를 행군한 일을 말한다. 이 기나긴 고난의 행군 동안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홍군에 자원입대하려는 농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중국공산당은 설명한다. 홍군은 비록 패주했지만 가는 곳마다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농민으로부터 군사력을 보충 받아 결국 국민당과 내전에서 승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장정은 오늘날 새롭게 대장정을 바라보고자 하는 연구자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들, 예를 들어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보다 개인적으론 중국의 혁명과정을 다룬 책들이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런 점에선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의 일대기를 구술 정리한 『위대한 길』도 마찬가지 재미를 준다. 왜 그럴까? 글쎄, 그 차이는 러시아와 중국의 차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차이, 혹은 중국 혁명 과정에 식민지 조선인으로 동참했던 우리 선각자들의 발자취가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이 혹은 다소간의 이유가 있더라도 1980년대의 운동권 분위기가 공연히 싫은 이들에겐 그 시기의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란 점에서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란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책은 중국공산혁명의 실체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전한 책이란 점에서 미리 색안경을 끼고 볼 일종의 선전물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은 뒤에 걱정할 일은 그것이라기 보단 다른 종류의 것이 될 거다.
에드거 스노우(Edgar Parks Snow)는 1905년 미국의 미주리주(Missouri)의 캔사스시(Kansas City)에서 태어나 1926년 미주리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신문학과에서 공부를 마쳤다. 1927년(우리처럼 군대를 안 가니 23살 한창 펄펄 날 때)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1928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간다. 그는 중국의 최대 격변기에 현장에 머물면서 북경 연경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1936년 6월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소개장 하나를 들고 중국의 머나먼 서북 지역 홍구로 떠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그 자신이 청년이었으므로 노회한 저널리스트이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으로 불타는 피끓는 청년의 심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에드가 스노우는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평범한 청년이었고, 모험가였다. 그의 직업은 물론 기자였으나 처음부터 기자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22세의 청년 스노우는 증권투자로 벌어들인 돈을 챙겨 한 1년 정도 전세계를 돌며 재미난 생활을 즐길 마음이었다. 애초에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지금 우리들처럼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크게 한 몫 벌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시대,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버마, 인도 그리고 훗날 방문하게 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그의 피는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기엔 너무 뜨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노우는 4개월간 서방세계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아직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마오쩌뚱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시 홍비(紅匪) 두목 마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그는 중국 혁명 지도부 인물들 -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만 만난 것이 아니라 홍군 병사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에 남겼다. 농민들은 홍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지를 밑바탕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중국 혁명의 성공과 정당성을 확신했던 자원자들의 사기는 높았고, 군기는 엄정했다. 그들은 봉건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이상으로 불탔고, 그들 안에서 이런 연대 의식은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어느 인간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없는 확신의 순간들을 그들은 살아갔다.
그들의 이런 넘치는 자신감은 국민당군이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뿌린 선전삐라의 뒷면을 사상 학습을 위한 노트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정부의 국민당군이 연일 진격해들어오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마오와 홍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병참을 동원해 홍군을 압박해오는 시기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장 1년여에 걸쳐 6천여 마일을 관통해 서북지역으로 이동해가는 대장정은 패배의 행군이었을지 모르나 그들의 생존은 그 자체로 승리의 행군이었다. 대장정을 통해 살아남은 홍군은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굶주림과 소수 민족의 습격을 받아 가며 홍군은 도리어 그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계기로 삼았다. 수백만의 굶주린 빈민들이 홍군의 태도를 몸소 경험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결국 마음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적극적으로 일원이 되고자 했다. 반대로 국민당군은 포위망이 뚫렸고, 그 과정에 만주, 상해, 열하, 하북 등을 차례로 일본군에 빼앗겼다.
어떤 이들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홍군을 밀어부쳤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당군이 할 수 있지만 참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외적 일본에 맞서 싸울 힘조차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2차 국공합작은 도리어 국민당 정부를 더 일찌감치 붕괴시킬 수 있는 상황을 저지해준 것이다. 한동안 『중국의 붉은 별』은 금서였다. 1985년 출간하자마자 금서가 되었고, 이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마오의 붉은 혁명이 남긴 흔적이 『중국의 붉은 별』이 기록한 흥분되고, 순수하며, 열정으로 가득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오는 혁명에 성공했고, 그 역시 숙청과정을 겪었고, 변덕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고, 잘못된 판단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민의 발걸음이 함께 했는지, 그 역사를... 나는 당신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당신의 오늘이 과거 그 순간의 뜨겁고 격렬한 역사의 현장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도 역사는 당신과 함께 변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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