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텍사스 (Paris, Texas)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해리 딘 스탠튼, 나스타샤 킨스키, 딘 스톡웰, 오로르 클레망
제작 : 1984 프랑스, 독일, 145분
종종 어떤 영화들은 풍설이다. 실제 영화를 본 사람보다 보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전설을 남기고 현혹된다. "파리 텍사스" 이 영화 역시 그런 영화일까. "파리 텍사스"와 "퍼펙트 월드"는 나에겐 좀 각별한 영화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성인 주인공들보다는 그 영화의 아역들에 좀더 감정이입되기 때문이다. "파리 텍사스"에서는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의 아들 헌터에게, "퍼펙트 월드"에서는 버치(케빈 코스트너)에게 납치된 필립에게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이 영화들은 마치 "전원일기"에서 주워기른 막둥이 아들로 등장하는 금동이가 어느날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는 대목에서 나와 내 누이가 밥상머리에서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철철 흘리던 그때의 막막하고 대책없는 서러움을 반복적으로 경험시킨다는 점에서 거리유지에 실패하게 만드는 영화다. "파리 텍사스"는 모호한 영화다. 빔 벤더스를 누군가는 길에 대한 가장 예민한 감식가라고 묘파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깨달음과 일탈, 환속과 일탈을 반복하고 있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난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떠나버린 아버지 트래비스가 밉다.
미국 오클라호마주와 경계를 이루는 텍사스주 북부에 실재한다는 파리 텍사스. 실재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여겨질 만큼 가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부유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첫 장면은 가학적일 만큼 아름답다. 공중 부감 샷에서 서서히 클로즈업되면서 황량한 사막을 건너는 트래비스의 붉은 운동모자가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는 붉은 야구 모자를 쓰고 양복을 입은 채 한정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간신히 마을 어귀에 도착한 그는 갈증과 더위에 지쳐 물을 찾지만 막상 입안 가득 얼음을 밀어넣고는 기절하고 만다. 그의 소지품을 통해 신원을 알게 된 의사는 LA에 살고 있는 월트에게 형을 데리러 오라고 말한다. 동생 월트는 형 트래비스와 형수가 떠난 뒤 조카 헌트를 친자식처럼(이들 내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길렀다. 월트의 아내는 형의 돌연한 출현 소식에 긴장한다.
실어증에 기억마저 가물거리듯 하는 형 트래비스를 끌고 동생 월트는 국도를 따라 LA까지 머나먼 길을 귀환해야 한다. "파리 텍사스"는 마치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를 역으로 비틀어 놓은 형색이다. 오딧세우스가 안드로마케와 텔레마코스를 고향 이타카에 두고 떠난 뒤 귀환하기까지 겪는 우여곡절이라면 "파리 텍사스"는 트래비스가 아내를 의심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르게 되고 가정을 잃고 아내를 찾아 머나먼 길을 방황하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트래비스는 프쉬케가 되고, 그의 아내는 에로스가 된다. 트래비스는 의심해선 안 될 것을 의심했고, 결국 가정을 잃었다. 4년만에 다시 만난 형제는 잠시 한 가정에 머물지만 헌터는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 동생 월트는 헌터가 아버지를 인정하도록 노력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헌터를 잃지 않을까 염려한다.
아내의 행방을 알려주면 형 트래비스가 떠날 거라고 생각한 윌트의 아내는 매달 아들의 부양비를 입금해 오는 은행을 알려주고 트래비스는 헌터를 데리고 휴스턴의 한 은행에서 무턱대고 기다린다. 그토록 그리워한 아내는 이제 환락가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남편과 아내는 유리 거울 벽을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대한다. 첫 만남에서 남편 트래비스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뛰쳐나가고 만다. 그리고 다시 찾은 유리 거울 벽에서 트래비스는 자신과 제인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준다. 그제서야 남편임을 알게 된 제인. 트래비스는 아들과 엄마를 만나게 해준 뒤 홀로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파리 텍사스"... 이 영화의 초반부에 형 트래비스는 동생 월트에게 파리 텍사스 이야기를 해준다. 그곳은 트래비스의 부모가 처음 사랑을 나눈 곳이고, 트래비스는 그곳에서 임신되어 태어났다.
나는 가끔 우리의 배꼽이 떨어지지 않고,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이어져 나와 꺽꽂이된 식물처럼 이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거대한 나무처럼... 탯줄로 이어진... 트래비스... 그는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 사랑에 상처를 주었고, 절망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음에도 그 사랑을 제대로 전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의심하고, 감금하고 마치 새장 안에 가둬두는 것처럼.... 거울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자기 자신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윤동주가 자화상 속의 인물에게 그러했듯 때로는 그 가증스러움에 대한 증오로 스스로가 못 견디게 미워질 때가 있다. 나는 나를 알기에 나를 사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내와 사이에 가로막힌 유리거울 벽을 마주한 트래비스가 발견한 건 아마도 못 견디게 미워진 자기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긴 여행을 한 오딧세우스가 가장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깨달음의 황량함...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숙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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