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 -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나는 테렌스 멜릭이 어째서 거장으로 추앙받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쩌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이유는 이제서야 "씬 레드 라인"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씬 레드 라인" 2편 모두 극장에서 보았다. 나중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비디오로도 몇 번 더 보았다. 물론 좋았단 뜻은 아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최소한 "씬 레드 라인"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극장에서 "씬 레드 라인"을 보았을 때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렌스 멜릭은 "황무지", "천국의 나날들" 단 두 편을 촬영하고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20년만에 만든 영화가 "씬 레드 라인"이었다. 나는 유일하게 "씬 레드 라인"만 보았으니 그가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유쯤 잘 몰라도 되겠지? 어쨌든 그런 까닭에 "씬 레드 라인"은 "오션스 트웰브" 못지 않게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설명이 필요없는 "숀 펜", "피아노"의 에드리언 브로디, 제임스 카비젤, 벤 채플린, 조지 클루니, 존 쿠삭, 우디 해럴슨, 닉 놀테, 존 트라볼타, 존 세비지 등이 이 영화에 주연, 조연, 단역을 맡았다.
1953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제임스 존스의 소설 "지상에서 영원으로"란 작품처럼 영화 "씬 레드 라인" 역시 제임스 존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전후한 태평양 전쟁 초기의 이야기라면 "씬 레드 라인"은 전쟁 중반의 과달카날 공방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 배경으로 쓰인 과달카날은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전쟁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전쟁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의 원주민들, 각기 다른 세가지 층위의 이야기들이 씨줄날줄로 엮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영화를 문화인류학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주요 인물 층위는 크게 세 부류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카비젤" - 나는 이 배우를 보고 문득 예수 역할을 맡으면 참 잘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 역을 했다 - 은 전장에서 삶과 구원의 문제를 따져 묻는다. "씬 레드 라인"은 각각의 배우들이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X맨류의 집단 히어로물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방식을 쫓지만, "씬 레드라인"처럼 각기 분리된 듯 하나로 합쳐지는 에피소드와 각각의 배우들이 독백을 늘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개는 한 명의 관찰자가 끊임없이 내레이션을 하는 스타일인데 비해 "씬 레드 라인"은 단역, 조역들의 독백도 많다. 처음 얼마동안 우리는 제임스 카비젤의 목소리를 듣는다.
영적인 질문들에 이어 그가 만나는 숀 펜.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사람들을 신뢰하는 편이긴 하다. 그는 건조하고 메마른 인물이다. 전쟁 전의 그가 어떤 인물이었을지 미루어 추측하긴 어렵겠지만, 전쟁이 이 남자의 강건한 성품의 외곽을 뚫고 나오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숀 펜은 그의 실제 성격과 정반대의 역할을 연기했다. 어떤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냉정한 현실주의자 말이다. 제임스 카비젤은 전쟁을 피해 원주민 거주지에 숨어 있다가 미군 순시정에 잡혀 다시 과달카날 상륙작전에 동원된다. 그의 탈영을 감싸안은 건 숀 펜이었고, 숀 펜은 그에게 의무보조병 일을 시킨다.
테렌스 멜릭의 "씬 레드 라인"에서는 여러 편의 괜찮은 전쟁 영화들을 한군데서 만나는 느낌을 받는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 그것이다. 과달카날 해안에 상륙한 직후 일본군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 예상했던 병사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해안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대신에 언덕의 고지 하나를 두고 무리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와중에 수많은 병사들이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에서는 "영광의 길"을, 죽어가는 일본군의 금니를 뽑아내는 미군 병사의 모습에서는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리게 된다. 언덕에서 병사들이 죽어가자 제임스 카비젤은 자원해서 기습조를 맡게 되고, 기습은 성공해 언덕 고지를 장악한다. 그런 그에게 숀 펜은 "자네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충고를 한다. 전쟁터에서는 자기 하나만 챙기면 될 뿐, 애써 동료들의 목숨까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조차 냉정을 잃고 무모한 정면 공격을 반대했었으면서도 말이다.
영화는 과달카날의 원시적인 자연과 높이 자란 풀들이 시원하게 펼쳐진 언덕에 자리한 지도책에 한 개의 점으로 표시된, 전략적으로 의미가 있는지조차 불명확한 고지 하나를 점령한 뒤 벌어지는 잔학한 총격전, 백병전을 보여준다. 마치 인디언 부락을 습격하는 기병대처럼... 그리고 한 병사의 실연을 보여준 뒤엔 원주민 커플의 자연스런 연애를 살짝 비춰준다.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씬 레드 라인. 아마 테렌스 멜릭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전쟁(소유)으로 상징되는 20세기의 문명이 아니었을까. 전투 뒤 포격으로 전신이 파묻힌 채 얼굴만 드러난 일본군 전사자의 "우리도 우리가 옳은 줄 알고 이 전쟁에 참가했다"는 독백은 그들이 일본군이라 쉽게 용서가 안된다는 우리네 민족 감정을 개워낸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전쟁도 명분없고, 정의롭지 않은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반대로 정의로운 전쟁이란 단 하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카비젤은 수색 작전 중에 부대원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이번에도 자원해서 위험한 임무를 맡는다. 그는 결국 죽는다. 그가 죽고 병사들은 과달카날을 떠난다. 물론, 역사 속에서 과달카날은 태평양 전투 가운데 중요한 전투였지만 실제로는 미군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본군이 대규모로 공격해왔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테렌스 멜릭은 "씬 레드 라인"을 통해 대자연 속에 결국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문명이 인간 자신의 영혼에 남기는 깊은 상흔과 자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을 대비시키며 적도 아군도 모두 한 줌의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제서야 이런 것들이 보이다니. 도대체 극장에선 뭘 한 건지 모르겠다. 이래서 영화 역시 책처럼 다시 읽기를 해야만 하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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