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이승희 시인의 <사랑은>에서 앞의 5연은 모두 마지막 연을 위해 쓰였다. 그리고 마지막 연은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를 위해 쓰였다. 종이에 베이면 칼로 베인 것보다 더 아프다. 종이에 베인 것이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아픈 이유는 종이가 칼보다 더 뭉특한 모서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종이는 사람이나 짐승 혹은 종이 스스로를 베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베거나 찌르거나 자르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칼이다. 사랑도 그렇다. 애시당초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아프게 하려는 목적 같은 건 없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에게 조용히 스며드는 일이고,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팔베게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베이면 더 아프다. 본래 종이의 용도가 베는데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을 먹고, 당신을 삼키고,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라면 아프지 않을리도 만무하다.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이승희 시인의 <사랑은>에서 앞의 5연은 모두 마지막 연을 위해 쓰였다. 그리고 마지막 연은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를 위해 쓰였다. 종이에 베이면 칼로 베인 것보다 더 아프다. 종이에 베인 것이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아픈 이유는 종이가 칼보다 더 뭉특한 모서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종이는 사람이나 짐승 혹은 종이 스스로를 베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베거나 찌르거나 자르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칼이다. 사랑도 그렇다. 애시당초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아프게 하려는 목적 같은 건 없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에게 조용히 스며드는 일이고,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팔베게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베이면 더 아프다. 본래 종이의 용도가 베는데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을 먹고, 당신을 삼키고,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라면 아프지 않을리도 만무하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태준 -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0) | 2011.04.14 |
---|---|
김정란 - 눈물의 방 (0) | 2011.04.12 |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0) | 2011.04.08 |
고정희 - 고백 (3) | 2011.04.07 |
최승자 - 삼십세 (1) | 2011.04.05 |
허영자 - 씨앗 (0) | 2011.04.01 |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1) | 2011.03.31 |
정윤천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2) | 2011.03.30 |
마종기 - 우화의 강 (2) | 2011.03.29 |
황규관 - 우체국을 가며 (0) | 201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