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문화실천 - 김창남 | 한울 | 1995
셰익스피어가 그랬다던가? 청춘은 뉘 반항할 이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이란 것이 과연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 기억들이 평생의 짐이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엔 알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흐르고, 다시 20년째를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돌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공부를 시작했다. 87년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열패감들은 낭패한 마음을 넘어 절망에 이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보란 인간의 승리였으나 인간에겐 선도 악도 늘 함께 있었으므로 진보가 늘 선의 승리를 의미하진 않았다.
서구에서의 진보는 오랫동안 일직선상에서 사유되었다. 진보는 전진 혹은 후퇴, 정체라는 세 가지 개념 속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보주의적 낙관론은 인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이상론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틀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80년대 한국의 진보진영은 이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이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시장경제론자, 보수주의자 등 - 혹은 타협, 야합의)은 동서냉전의 승부에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 결과로 동구에서도 자본주의는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진보라 믿었기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균열은 동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의 미로를 걷는 인간"이란 글을 통해 "21세기를 앞둔 시기,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그 두 이념의 패배가 진보의 확고한 전진을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말한다. 후쿠야마에게 이는 시장경제의 확고한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역사의 중지를 의미했다.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처럼 보인다. 낙관과 비관의 틈새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과연 역사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는 걸까. “행복한 결말”이, “비극적 파탄”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이렇듯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 녹아 있는 고민의 흔적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의 이런 고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새로운 기획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제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영역으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 <중략> … 진보진영의 문화적 관심의 증폭이란 좀더 정확해진 문화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민중문화운동에서 명백히 대중문화로 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중략> …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다기다양한 논쟁이 지금 진보진영의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주목되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강조되던 시절에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일상성’과 ‘생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본문 15-16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장(場) - 일상, 실패와 성공의 공간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김창남은 지난 80년대 진보진영의 인식은 “대중문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운동적 실천에 의해 상대적으로 얼개를 갖추어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80년대 독재와 반독재가 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시대에 대중문화, 대중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회복이 절실했고, 긴박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말대로 “그동안의 진보의 논리가 대립과 적대의 틀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0년대식 문화비평에서 대중문화의 의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비록 군중(mob)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대중(mass)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과 문화를 일정하게 분리하여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산업, 즉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의 상업적 가치를 재생산하도록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8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주로 생산체계에 집중되었고, 이후 9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텍스트를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김창남은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서 “대중은 주어진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선택하고 선별하여 특유의 방식으로 해독하고 변형한다고 주장한다. 즉, 대중의 문화실천은 주어진 문화, 텍스트에 반영된 구조의 논리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이론적 논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당시(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 ․ 문화산업의 현실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부분들은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전의 명징함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화산업의 현황 부분에서 85년의 외화자율화와 87년의 직배사 허용 문제를 놓고 지적하고 있는 절망적 어조는 한국 영화 1,000만 명 시대에 도달한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도 있다. 제4장 「문화시장의 개방과 민족문화의 새로운 모색」에서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측과 정반대로 진행되는 양상 또한 존재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보장하는 풍부한 자국시장과 잘 발달된 다매체 ․ 다채널을 이용한 창구효과, 가장 넓은 언어권, 풍부한 자본과 기술, 인력 등의 요인을 배경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조차도 탈규제와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미국 프로그램의 시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성급히 다매체 ․ 다채널 시대를 맞게 됨으로써 미국 문화산업에 의한 시장장악은 한층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역시 머지않아 이루어질 전망이다. 만화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사실상의 개방이 이루어진 지 오래이긴 하지만 일본영화나 가요의 수입이 합법화될 경우,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정 기간 안에 우리시장내 일본문화와 가요의 영역이 확보될 것이며 이는 그만큼 우리 문화산업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때문이다. <본문 38-39쪽> 중에서
위의 전망이 예견한 바대로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산업이 미치고 있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지만 우리 문화산업의 전반이 미 ․ 일의 문화산업 때문에 현재 위축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은 위와 같은 현황 분석과 전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핵심”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첨예한 이분법에 근거한 기존 방식의 문화운동은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를 그 출신성분에 따라 선험적으로 가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실천태 속에서 지배적인 층위와 저항적인 층위를 변별하는 일이다. 여기서 문화운동은 대중의 일상적인 문화실천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층위를 약화시키고 대항적 층위를 강화시키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중을 단일한 계급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화된 하위집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하게 분화된 대중집단의 삶의 조건과 현실, 욕구와 감각에 대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각 집단에 맞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찾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우리의 대중문화 읽기가 단지 텍스트 분석의 차원에서 나아가 ‘대중읽기’의 차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75쪽> 중에서
“대중과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화한다. 이러한 전망은 80년대 문화비평이 지니고 있던 한계 -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던 -를 극복하고, 문화적 진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대중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90년대 한국사회 하위문화의 다층적 구조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의 2부는 그간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해왔던 하위문화 방법론을 국내에 적용해 본 사실상 최초의 연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난 1991년 동구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우연찮게 맞물리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신세대문화 담론으로 들끓었지만, 실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모두가 즉자적(卽自的)이고 감각적인 반응으로 신세대 문화담론을 유행처럼 소모했을 뿐이다. 김창남은 2부에서 우리 사회의 각 하위 집단이 동일한 물질과 역사적 조건 속에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들을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우선 부모계급문화와 일정하게 대립되면서 상호의존적 형태로 나타나는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과 특성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 청소년 집단이 보이고 있는 문화적 실천의 특징은 모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집단이 부모계급문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적극성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학교라는 기성문화의 재교육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을 저항적 의미로 수용한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더욱 적극적이고 예민한 자세를 보인다. 김창남은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여학생들이 겪는 억압이 남학생들에 비해 더 심하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창남이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에 대해 가하고 있는 분석에서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기존의 신세대론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신세대론이 가지는 큰 맹점 중의 하나가 청소년 세대가 부모세대와 비교하여 가지는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그들의 저항이 결국 ‘상징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청소년들은 아직 부모세대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러한 현실적 조건을 거부하기 보다는 그에 타협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 타협의 형태가 상징적인 수준에서의 저항이라는 하위문화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본문 126-127쪽> 중에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집단은 역시 사회 계급이다. 그리고 주요한 문화적 흐름은 계급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김창남은 이를 다시 세분하여 “사무직 노동자 집단, 생산직 노동자 집단, 중산층 주부 집단”으로 구분한다. 사무직 노동자 집단이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 청소년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들이 대중음악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는데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생산직 노동자 집단이 보이는 태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대중음악 취향과 실천은 작업장의 환경, 경제적 여유의 부족 등으로 인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하위문화적 특성 - 혼자 노래부르기, 집단적 공간에서의 소리지르기, 일하며 듣기 등 - 을 드러내고 있다. 중산층 주부 집단은 사무직 ․ 생산직 노동자 집단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부들은 일상에서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궁극적인 탈출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종속적인 위치를 당연시하고 있다, 그들의 도피는 스스로 인식하고 있듯이 일시적이며, 종속적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주부들은 남성가수의 여성화 경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 여성 가수에 대해서는 규범적인 여성성을 주문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면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여성가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기본적으로 기성의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면서 신세대 자녀를 키우는 중년세대로서 경험하는 문화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여성’으로서 가지는 종속적 위치와 접합하여 다소 착종된 정체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20-221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공간에서 기획의 주체로 선다는 것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우리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존재로 실천해간다면, 문화의 일상은 더 이상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다. 일상, 그것은 변혁에 대해 품고 있는 희망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 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은 김창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 또한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적 ․ 문화적 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 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대중의 자발적인 문화실천에 대한 진지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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