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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문학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소를 웃긴 꽃 ㅣ 문학동네 시집 90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지난 언젠가 화요일에 나는 선배 박형준 시인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 지금 한국의 시인들이 처해있는 다소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국밥을 밀어 넣었다. 밥알을 씹으며 한 편으론 한국의 시인들이 현대미술이 처한 난관과 흡사한 난관에 처했다는 생각을 했다. '형, 문학이 문학 그 자체의 힘을 잃고, 자꾸만 철학이 되고, 정치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시 문학은 살아있다. 비록 커다란 변화의 조짐들이 불길한 징조가 되어 연이어 출현하고 있지만. 오늘 아침 출근을 하니 또 한 명의 선배 시인이 새로 시집을 냈다고 시집을 보내주었다. 간만에 읽는 신간 시집이다.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에서 그의 정돈된 시세계가 깔끔하게 읽히긴 했지만 나에겐 어딘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랄까, 매력이란 측면에서 다소 약하단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해 마치 미인의 얼굴은 보통 사람의 얼굴에 비해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지만 이것을 CG(컴퓨터 그래픽)를 통해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만들어내었을 때, 미인의 자연적인 얼굴이 CG로 만들어낸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희상 첫 시집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크게 흠잡을 데 없이 무난하지만 그 무난함이 덜 매력적이었단 뜻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를 통해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는데, 이때 거울 앞에 섰다는 것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이 바라본 것은 누님이자 동시에 자신과 대면하는 누이의 자아이자 곧 자신(독자)이기도 하다. 윤희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소를 웃긴 꽃』은 근래 보기 드물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시집이었다. 문학이 철학과 다른 것은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들 역시 시를 잘 읽어내기 위해 적절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철학자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윤희상의 두 번째 시집이 시와 독자, 시인과 독자, 시인과 사회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 - 어쩌면 그것이 ‘대면의 소실점’일지도 모르겠지만 - 에 서 있다고 느꼈다.

나와 너의 사이는
멀고도 가깝다
그럴 때, 나는 멀미하고
너는 풍경이고,
여자이고,
나무이고, 사랑이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
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농담할 수 있는 거리> 중에서)


‘나와 너’는 세상의 전부다. 한겨울의 고슴도치처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눠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중력에 끌려들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면 세상은 곧 풍경이 되어 멀어진다. 불교 『유마경』의 가르침은 “나는 곧 너다”인데, 이 말은 진정한 보리심의 발현은 나와 너를 나누고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사랑하되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는 너를 바라본다. “나와 너의 사이가 /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꿈꾸고 희망한다. 윤희상은 김수영의 “바로 보마”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윤희상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바로보마,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을 관류하는 이미지는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거리를 두고 바로 보고자 한다. 다만 그 거리(距離)는 냉소도, 뜨거운 참여도 아닌 성찰(省察)의 거리이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여자가
오면, 거울이 열린 문으로 여자에게만 숨기고
있는 여자를 보여준다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다 여자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자를 본다 들뜬다 그럴 때마다, 거울은
여자의 뒤로 숨는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침묵한다
(<거울과 여자> 전문)

나에게는 금붕어가
어항 속에 있고,
금붕어에게는 내가
어항 속에 있다
그래서,
금붕어와
나는 밤이 새도록 싸웠다
(<금붕어와 싸웠다> 전문)


윤희상의 시세계에서 대면의 이미지는 여러 형태(거울, 어항 등)로 변주되지만, 대면 자체가 성찰로 고스란히 연결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이 정직하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백설공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고 여긴 계모가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를 불러본다. 이때 거울은 계모의 모습을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계모의 욕망을 비추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거울 자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지만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다. 세상은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모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계모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을 추구하여 결국 거울 속에서 아무 것도, 자신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금붕어와 나는 마주 하고 있지만 ‘어항’이란 자의식, 세계에 갇혀 서로를 진실로 마주 대하지 못한다. 시인은 대면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그저 대면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9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전문)



나주 장날,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높게 쌓아놓은 채 다듬고 있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낯선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남기고 간다

“그것을 언제 다 할까”

그러자,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전문)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는 시의 제목과 내용이 반전되어 있다. 대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몸을 드러내고 상징하는데 비해 이 시에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내용보다 길어 시의 몸을 제목이 수식해주고 있다. ‘내 친구 9’는 ‘행인1,2,3’가 마찬가지로 익명(匿名)의 존재다. 그러나 익명이란 스쳐가는 존재인 ‘행인’에게는 어울리지만 친구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대면의 소실점 저 멀리에 서 있는 친구, 끝끝내 익명으로 남아버린 친구, 그나마 자세히 보아야 내 친구인 줄 알지만, 자세히 본 것만으로 친구의 익명성이 제거되지 않는다. 설령, 시인이 친구의 실명을 거론했다 한들 우리에게 그 이름이 익명 이상의 의미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 그저 대면한다는 것은 이처럼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가 주는 깨달음은 마치 선사(禪師)들의 선문답 한 토막 같은 짧은 대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이 절묘한 시이다. 이 깨달음을 속담으로 옮겨보자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바라보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 그런 의미에서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게으른 것인가를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집의 전반부가 이처럼 극히 ‘개인적’인 성찰, 그래서 서정적인 의미에서의 성찰을 담고 있다면 시집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대면의 이미지는 사회적인 확장 과정을 거친다. 편의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시집의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 깃발을 붙잡고 있다>, <시인에게, 숲 해설가는 말한다>, <田榮鎭>, <光州 五月團> 등의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윤희상 시인의 이번 시집 『소를 웃긴 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시 문학이 위기로 내닫고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보기 드물게 매우 뛰어난 시집이다. 나 스스로는 ‘입구(口)자 연작시’라고 호명할 만한 세 편의 시(<검색창, 세상에서 가장 큰 입>, <下官을 마친 뒤에 울었다>, <아이들아, 재래식 화장실은 무섭지 않다>)가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비유들이
 이 시집의 매력과 재미를 한껏 높여 준다. 이 가을에 자기만의 견고하고 튼실한 시세계를 구축해가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 사실 나는 학연이든, 지연이든, 혈연이든 하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다시 말해 윤희상 시인과 내가 학연으로 얽혀있다고 해서 그의 시집을 서평하거나 호평을 하는 일은 결코 없지만), 가끔 추억이 겹친다는 점에서 현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인연의 줄기를 더듬어 보게 되는 일조차 부인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학연이라는 공통된 인연 때문에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시가 ‘최인훈 선생님에게’란 부제가 달린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이다.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빠르게 움직이잖아
기막히게 앞으로 내다본단 말이야
약효가 떨어지면, 재빨리 다른 약을 찾아야지
지금은 마오쩌둥이나, 마르크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란 것이지
주체사상을 붙잡고 있는 북측이
다시 단군을 붙잡았단 말이야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 중에서)


나의 오래된 스승인 최인훈 선생과 시인이 나누었을 법한 대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면서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낯익고, 정겨운 장면, 그리하여 너무나 그리운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당신은 지금쯤 한창 북미관계의 변화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실 터인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일까. 스승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