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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나쁜 친구/ 앙꼬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만화책을 보세요-02>
나쁜 친구/ 앙꼬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내 인생이 궤도를 이탈하던 순간
과거 일요일 저녁에 해주던 프로그램 중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란 것이 있었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詩)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 인생의 고비에 선 주인공 이휘재가 선택의 기로에서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면 화면이 양 편으로 갈라지면서 각각의 선택에 따른 인생의 결말을 보여주는 코미디물이었다.


나름 한 세월을 살아낸 뒤 돌아보면 우리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렸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도 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어느 순간들은 무수한 사건의 점(點)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선(線)이지만 때로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은 대나무 마디처럼 결정적인 순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우리는 절합(節合, articulation)이라 부른다.


돌아보면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나는 반장이었고, 교문 앞을 지키는 선도부였으며, 한 편으로 학생회 간부 직책도 맡았던 이른바 ‘범생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1학기, 1986년의 3월이든가 4월의 어느 봄날 수업 중에 난데없이 찾아든 학생부 주임 교사는 나를 운동장이 보이는 복도 창가로 데리고 갔다. 그는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얹고 운동장을 바라보며 내게 조용히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우린 네가 결손가정 출신이란 거 안다. 조용히 지내다가 졸업 잘 하자.”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게다. 내 인생이 궤도를 이탈하며 파열음을 냈던 순간은….







나쁜 친구는 누구였을까?
‘앙꼬’라는 다소 독특한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는 자기소개에 “1983년 경기도 성남에서 최양길 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는데, 지난 2007년 단편집 『열아홉』을 펴낸 데에 이어 두 번째 작품집 『나쁜 친구』(창비, 2012)를 최근 펴냈다. 앙꼬의 첫 번째 장편 『나쁜 친구』는 전작인 『열아홉』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동명의 단편에서 주인공이었던 여고생들의 과거(여중생)로 거슬러 올라 열여섯 시절부터 시작하는 연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앙꼬의 자전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진주’와 단짝 친구 ‘정애’는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사고뭉치들이다. 학교에서는 후배들을 괴롭히는 일진으로 수업을 서슴없이 땡땡이치고, 가출해서 여관에 투숙하고, 나이를 속이고 룸살롱에 나가는 등 세상의 격류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작가는 그런 정애의 일탈 원인으로 가정 문제를 지목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의 자전적 주인공인 진주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과도한 폭력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원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폭력이 진주의 일탈을 부추긴 원인인지 진주의 일탈로 인해 속이 상한 아버지가 참다못해 그에 대한 분노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난 아직도 가끔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안심할 때가 있다. 사람은 맞지 않아도 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안 걸까. 하지만 아빠만은 … 아빠가 할 수 있었던 건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애에게도 그런 아빠가 있었다면 난 그 친구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문 76~78쪽>

진주는 또래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친구 정애에 대해 상당히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예를 들어 이들이 여중생 시절 행한 첫 번째 가출을 주도한 것도 정애이고, 나이를 속이고 룸살롱에 취업하기로 결정한 것도 정애였다. 룸살롱에서 2차 성 접대 요구를 받고 놀란 진주는 룸살롱 마담 언니에게 자신이 중학생이란 걸 밝힌다. 마담은 “나도 너만 할 때 집을 나왔어. 그리고 그 후로 계속 이렇게 살고 있잖아. 오늘은 언니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그냥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이런 데 오면 안 된다”며 집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진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정애는 얼마 뒤 다시 가출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내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원하던 만화가가 된 진주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옛날의 단짝 정애를 만나지만 외면해 버린다.


작품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작가는 자신이 정애의 ‘나쁜 친구’였음을 고백한다. 2차 성 접대 요구에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진주와 정애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진주가 룸살롱에 나가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여관에서 놀고먹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정애가 혼자 룸살롱에 나가서 돈을 벌어왔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왜 스스로를 나쁜 친구라고 했을까? 2차 제의를 받고 뛰쳐나온 자신을 안아주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라며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낸 마담 언니를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이 자신에겐 있었고, 정애에겐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에겐 실패해도 돌아갈 수 있고,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가정이 있었지만, 정애에겐 그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후회였을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에게 당신은 어떤 인연일까? 10년 아니, 20년 뒤에 당신 아니, 나란 사람은….

* 함께 보면 좋은 책 : 『열아홉』, 앙꼬, 새만화책,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