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唯上知與 下愚不移(뛰어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중에 이론의 측면에서는 '안회'를, 실천의 측면에서는 '자로'를 특히 사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불행은
이처럼 아끼던 두 사람의 제자를 모두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아픔을 겪은 일이다. 한 명은 가난으로, 다른 한 명은
그의 곧고 불 같은 성정 탓에 생선회처럼 포가 떠진 뒤 소금절임이 되고 만다. 공자는 자로의 이런 곧고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을
염려했고, 위나라에 급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제자 중 '시'는 무사히 돌아오겠으나 '유(자로의 이름)'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을 만큼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소금절
임이 되어 돌아온 자로, 공자는 그런 제자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그날부로 자신의 집에서 절임 반찬을 모두 내다버리게 하고 평생
절임을 먹지 않을 만큼 자로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공자는 자로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자로를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공자조차도 자신의 제자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이 일화는 생각하기에 따라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토론이나 논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변화나 설득 자체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군가의
논변에 따라 쉽게 설복 당하고, 변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의 가능성을 닫아두고서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상대의 말문을 닫게 만든다고해서 그 사람이 설복당하고,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때로는 대화 자체가 논점이을 흐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잘못 이끌거나 변질시키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토론이나 논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로 출발하는 사람은 출발점 자체가 그릇되었으며 그 사람의 변설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 듯 해보여도 결국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들일수록 아무리 조목조목 따져
잘못된 점을 일러주어도 결국 자신이 변설에서 밀렸다고 생각할 뿐 자신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흔히
무언가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담지자(膽智者)라고 하는데, 담지자란 '담력과 지혜를 동시에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담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어리석고 못난 자는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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