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 민중이여, 일어나라!"
- 김혜린의 『테르미도르』
세 가지 색(블루, 화이트, 레드)과 줄르, 유제니, 알릐느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순정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를 통해 발표되었던 만화를 다시
엮은 복간본 만화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예술 장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화만큼 성별분업(性別分業)이 확실한 장르도 드문
편입니다. 순정만화란 카테고리는 그 자체로 여성들만 보는 작품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지니까요. ‘앤서니와 테리우스’로 표상되는 순정만화 특유의 캐릭터들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순정만화란 호명 속에는 여류
시인이란 호명이 지닌 문제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순정만화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역사만화로 분류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789년 7월, 왕과
특권층이 삼부회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프랑스 전역이 혁명의 열기로 들끓던, 이른바 1789년
‘7월의 대공포’로 시작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레미제라블』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실존인물들이 무수히 교차하는
대하서사만화이지만, 주인공은 혁명의 대의에 동감하는 귀족 청년 ‘줄르’, 귀족이 되려고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한 혁명주의자 ‘유제니’, 폭도들에게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줄르의 생사마저 알 수 없게 된 귀족 아가씨 ‘알릐느’,
이렇게 세 명의 가상인물입니다. 이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처럼 『테르미도르』를 이끌어가는 세 가지 색
주인공들입니다. 줄르는 ‘자유’, 유제니는 ‘평등’, 알릐느는 ‘박애’를 상징하지요.
김헤린의 『테르미도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프랑스 혁명사를 줄줄 꿰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할 수도
있지요. 역사를 재구성하는 이른바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가 하나의 흐름이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역사를 멋대로 희화화하거나 근거도 없이 왜곡을 일삼는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허구(虛構)라 할지라도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이상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굳이 홍세화 선생의
추천사가 아니어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민중이라는 괴물의 등에 올라탄 부르주아지 혁명
프랑스 혁명을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간단히 정리해보면 전제왕정 밑에서 세력을 형성해 가던 시민 부르주아지
세력이 절대 군주가 개최한 삼부회의를 통해 그들이 국민을 대변하는 존재임을 자처하며 국왕(및 왕당파 귀족 세력)과 벌인
권력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퀼로트도, 상퀼로트도 입을 수 없었던 노동자, 농민(무산계급)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용해
왕과 귀족들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왕을 살해한 뒤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들이 왕을 처형한 최초의 권력찬탈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은 원시
시대 이래 꾸준히 살해당해왔고, 프랑스 혁명 바로 얼마 전에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왕을 효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시킨 것은, 자신들이 왕을 제거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을 감옥에서 풀어주었으며, 그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민중’이라는 괴물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이전의 혁명(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달랐던 점은 특권계급에 속했던 왕과 귀족, 부르주아지들이 서로 적당한 지점에서 권력을 나눌 수 있는(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면서 민중의 등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때를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혁명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 민중의 각성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도시 민중들과 결합한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의 숫자도
많았습니다. 이들이 훗날 자코뱅이라 불렸던 마라와 당통, 에베르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혁명은 처음부터
혁명의 자식들을 제물로 삼을 운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국가 프랑스를 살려내기 위해 민중의 활력은 소진되어야 했고, 혁명적
부르주아지(혁명가)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공포정치의 내용이었고, 희생자들의 명단은 민중의 자발성이 거세되는 전개과정의
화려한 프랑스식 만찬 메뉴였습니다.
프랑스식 공포의 만찬을 능숙하게 요리한 김혜린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베르사유의 장미』나 러시아혁명을 다룬 『올훼스의 창』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작품의 여주인공인 알릐느가 자신의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박애의 길)를 찾아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의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김혜린은 이처럼 복잡한 프랑스식 만찬(대혁명의 역사)을 훌륭한 솜씨로 요리합니다.
혁명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부모(귀족)를 잃은 알릐느는 혁명에 앞장선 유제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아 출신의 유제니는 혁명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알릐느의 연인 줄르 역시 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이미 파리에 있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이유로 혁명의 수도에 모입니다. 알릐느는 혁명에 복수하기 위해 왕당파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미모와 노래를 팔고, 줄르는 프랑스
혁명을 기록하고, 자신이 쓴 글을 익명으로 잡지에 기고하는 작가가, 유제니는 혁명가 마라의 하수인이 되어 반혁명세력을 감시하는
특무대원이 됩니다. 이렇게 두 명의 남자를 앞에 놓고, 한 명의 여자는 처음부터 사랑한 남자와 처음엔 증오했지만 사랑하게 되는
남자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엮어나가게 됩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유제니가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알릐느는 줄르와 함께 유제니가 보살폈던 거리의 아이들을 거둡니다. 그리고 두 사람(알릐느와 줄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유제니란
이름을 붙이죠. 평등을 상징하는 유제니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자유를 상징하는 줄르는 살아남았습니다. 자유와 박애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평등은 죽임을 당했지요. 어쩌면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비극이었을 겁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로베스 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지은이) | 양희영 (옮긴이) | 최갑수 | 교양인 | 2005
* 지난 2012년 2학기부터 2013년 1학기까지 "인천교사신문"에 만화비평을 연재하고 있는데(모두 6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들과 함께 만화를 통해 역사와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기획해보았는데
원래는 한 학기만 하기로 했던 것이었지만 반응이 좋아서 한 번 연장했었다. ^^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옛날 만화들을 뒤적이며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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