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의 개』 1~4(완결) |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은이) | 미우(대원씨아이) | 2012
대체 일본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일본을 가리켜 우리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릅니다. 한일 양국의 역사는 상고시대(上古時代)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해방 68년, 한일국교 정상화 48년이 지나도록 양국은 아직도 과거사를 둘러싼 불신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의 우경화와 맞물린 잇따른 망언으로 그간 양국이 쌓아왔던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은 아니며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며, 만약 평화헌법이 개정된다면 분리 독립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역시 전후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지난호에 소개했던 『바람의 검심』이 일본의 근대화를 촉발시켰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한 시대를 그린 일종의 오락만화였다면 『왕도의 개』는 유신 이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직전까지의 일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유신 이후 자유민권의식이 높아진 농민들이 벌였던 일본 최초의 근대무장봉기인 1884년 치치부(秩父) 사건으로 시작해서 갑신정변, 1885년 오사카 사건, 1894년 동학농민운동, 김옥균 암살,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전봉준 처형,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을미개혁 그리고 1900년 중국의 삼주전(三洲田) 봉기에 이르기까지 한·중·일 삼국이 근대의 길목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만화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의 작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왕도의 개』를 기획하게 된 까닭은 오늘날의 일본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역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이 그릇된 근대화(제국주의)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청일전쟁 때부터라고 말합니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빛과 그림자, 카노와 카자마
성인만화(成人漫畵)라고 하면 에로틱한 내용을 먼저 연상하지만 『왕도의 개』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을 차용해 작가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역사 인식을 진지하게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본격 성인만화입니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실존과 가상인물이 무수히 교차하지만, 한·중·일 삼국이 근대화를 통해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가야 한다는 왕도(王道)의 길을 걷고자 했던 카노 슈스케(加納周助)와 개인의 입신양명을 추구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하는 패도(覇道)의 길을 걸은 카자마 이치타로(風間一太郎)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이 중심입니다. 두 사람은 자유민권운동이라는 하나의 뿌리(공동의 경험)에서 나왔지만,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서 일본 근대의 명암(明暗)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이 펼쳐내는 우정과 대립은 일본 근대사의 축쇄도(縮刷圖)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카노의 배후 인물로 등장하는 카츠 카이슈(勝海舟, 1823~1899), 카자마의 스승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1844~1897)는 실존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막부의 권력을 빼앗아 천황에게 되돌린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서남(西南)전쟁, 메이지 유신까지는 동지였지만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서로 정적(政敵)이 됩니다.
일본 근대화의 스승으로 현재까지 일본 1만 엔권 지폐 인물로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추동했고, 같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근대화 속도가 일본에 뒤처진 조선과 청(중국)을 멸시하고, 조선을 일본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조선을 병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를 일본화한 후쿠자와의 논리는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쿠자와와 함께 패도의 길을 상징하는 무츠 무네미츠는 유신 이래 일본이 서구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일 통상조약(1894)을 성사시켜 영국의 치외법권을 회수하는 등 외교적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반도는 언제나 붕당 간의 다툼이나 내분·폭동이 잦은 곳으로, 사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독립국답게 책임을 다하려는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이를 광구(匡救)하려 도모하지 않는 것은 이웃 나라의 우의에 반할 뿐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 자위의 길에서도 어긋남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인즉, 일본정부는 조선국의 안녕을 꾀하는 계획을 담당하는 데 추호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왕도의 길을 주창했던 카츠 카이슈는 한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등의 정한론(征韓論)에 동조한 바도 있지만 이후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 조선, 중국 세 나라가 연대를 맺어 함께 대항해야 한다”며 아시아 연대론을 펼쳤던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을 멸시하던 당시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조선이라면 반쯤 망한 나라라고, 빈약국이라고 경멸하지만 나는 조선도 소생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조선을 바보로 여기는 것은 근래 들어서의 일이며 옛날 일본 문명의 종자는 모두 조선에서 유입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처분은 그 처음부터 이미 잘못되었으니 어찌 그 끝을 좋게 이루겠는가. 만일 오늘과 같은 시간이 지속된다면 이웃 나라는 반드시 그에 대해 극단적인 주장을 할 것이다. 일본의 조치는 동양의 치안을 해친다. 그래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혜안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김교신, 함석헌 선생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같은 이조차 “청일전쟁은 우리에게 있어 실로 의로운 전쟁”이라며 지지했던 청일전쟁을 “대의명분이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한·중·일 삼국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인물들이 펼쳐내는 역사
출판사는 이 작품을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왕도의 개』에는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김옥균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해 고종 황제,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중국의 쑨원 등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카츠 카이슈와 김옥균, 쑨원을 아시아의 연대를 통한 평화적인 근대화를 꿈꾼 이상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의 일개 사상가와 그 하수인 역할을 자처한 주인공의 노력만으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의 물꼬가 트이고 가로막히는 일이 가능했을까 반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탁월한 솜씨는 그런 의문을 넘어 우리에게 동아시아 근대화의 역사를 곱씹을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차근차근 공부해본다면 그것만으로도 동아시아 근대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일본 망언의 계보(개정판)』 - 다카사키 소지 (지은이) | 최혜주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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