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주, 캡틴큐의 골 때리는 추억
요즘 내가 맛 들인 음료 중 하나가 '모히또(Mojito)'라는 칵테일인데, 시중 카페에서 판매되는 것들 중에는 무알콜음료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럼주와 민트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쿠바'하면 떠올리게 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음료(칵테일)이다. 이처럼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중에 유명한 다른 한 가지가 ‘피나콜라다’다.
느닷없이 '모히또'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사실 럼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하면 떠올리게 되는 '칼바도스(Calvados)'가 있듯(조앙 마두가 즐겨 마셨던 사과증류주) 근대 해양소설들을 읽노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술이 바로 뱃사람들의 술인 럼주이고, 럼주하면 해적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가? 국산 럼주였던 ‘캡틴큐’에는 애꾸눈 선장이 새겨져 있었다. ‘캡틴 큐’는 돈 없이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에 고딩 때 동네 친구들과 즐겼던 국산 양주 이름인데, 내 연령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던 기억들이 있으리라.
'럼주'하면 사탕수수와 카리브 해, 그리고 쿠바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본래 인도네시아였다. 동서 해상 무역을 관장하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 연안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신항로 개척 시대 스페인인들에 의해 카리브 해 서인도제도의 악명 높은 플랜테이션 농장 산업이 되었다.
어쩌면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발견한 진정한 황금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들어진 ‘백색 황금, 설탕(suga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부산물인 당밀(Molasses)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천 우리 사무실 바로 뒤편으로 제일제당 인천공장이 있는데, 주차장에 밤새 차를 주차해본 사람들은 차량 위로 뭔가 얇은 막이 도포된 것처럼 끈적끈적한 입자들을 느낄 수 있다. 추측컨대 당밀 입자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당밀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끈적거리는 캐러멜 빛깔의 액체다.
17세기 초(1651년)쯤 누군가는 당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럼주다. 폐식자재(?)를 이용한 - 당밀 자체는 설탕 성분만 빼낸 것이고 사탕수수에 담겨있는 본래 영양분은 고농축된 재료 - 술이기 때문에 럼주는 매우 값싼 술이 될 수 있었고,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부두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부두노동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술이 될 수 있었다.
럼주를 구분하는 법은 일단 색깔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진한 것을 다크럼(다크 럼은 당밀을 천천히 자연 발효시켜서 단식 증류), 갈색 빛의 럼을 골드럼, 그리고 무색의 투명한 럼을 화이트럼(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 증류기를 사용해서 증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색깔의 차이가 나는 것은 증류 과정에서 당밀의 잔류 유무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인데 이중에서 다크럼이 우리가 영화나 모험소설 등을 통해 접했던 것처럼 해적들과 뱃사람들이 즐겨 먹던 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외에도 생산지나 제조법에 따라 구분하는 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헤비 럼:자메이카산이 유명하다. 자연발효로 만들어지며, 다량의 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어 강한 향기가 있다. 발효에는 효모 외에 부티르산균 (낙산균) 등이 간여하고, 증류는 포트스틸로 하며, 증류액은 통에 저장한다. 숙성기간은 최저 3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②미디엄 럼:가이아나에서 생산되는 데 메라라 럼이 유명하고, 향미는 헤비 럼과 라이트 럼의 중간이다.
③라이트 럼:순수하게 배양한 효모로 발효시키고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바베이도스 · 쿠바 · 푸에르토리코 · 트리니다드토 바고산이 유명하며, 향미는 부드럽다. 한국에서도 럼이 생산되고 있는데, 라이트 럼에 속한다. 럼은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외에 다이키리 등 칵테일의 바탕이 되는 술로서 널리 이용되며, 최근에는 라이트 럼이 많이 애용되고 있다. 또, 럼의 감미로운 향기는 양과자에 아주 적합하여 설탕의 감미와 달걀의 비린내를 완화시켜 준다고 해서 다량의 럼이 제과용으로 쓰인다. 또 크림이나 젤라틴에 섞거나 과실을 럼에 담그기도 하며, 아이스크림에 가미하여 맛을 더하는 데도 쓰인다.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럼은 어떻게 해적의 술이 되었을까?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집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는데 우리 집에서 적지 않은 술이 나와서 놀랐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진짜 1년에 서너 차례 정도)에 이렇게 많은 술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술이 나와서 놀랐고, 이 술들의 생산 연도가 너무 오래되어서 놀랐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 것들이라 과연 이 술들을 버려야 하는지, 마셔도 되는 건지 궁금해서 네이버 지식in 검색을 해보니 술(알콜)은 과실주 같은 술들이 아니라면 모두 음용 가능한 것들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술병의 라벨들을 찾아보니 유통기한 표시 자체가 없었다.
가끔 회사 직원들이나 주변의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냉장고나 컬러 TV가 집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연령대가 높은 이들은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백색가전의 3종 신기(神器)’ - TV, 냉장고, 세탁기 -를 누리며 살았던 세대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이들 제품이 주는 혜택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리어 신기해졌다. 이중에서 냉장고는 오늘날 우리 가정의 식품저장창고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식품들을 어떻게 저장해놓고 먹었을까? 음식의 부패를 어떻게 막았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3세기부터 인류의 항해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연안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드디어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항해가 길어지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음식, 그 중에서도 식수였다. 원양에서 신선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 비를 만났을 때 이것을 잘 거두어 통에 보관해 마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식재료들은 말린다던지,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일정 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었지만 식수는 오크통 같은 보관용기에 보관하다보면 금세 상해서 마실 수 없게 되거나 그 물을 마시더라도 세균이 번식하기 때문에 복통과 설사, 식중독 등을 유발하여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술이었다. 어쨌든 술도 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음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성경 등 사막 기후의 식생활 풍경을 보면 종종 포도주와 물을 섞어 마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한자동맹 등에서는 물과 함께 맥주와 와인을 식수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술들은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는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좀더 먼 바다로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보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지나면서 금방 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위스키 같은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기 때문에 좀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선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제공하기엔 가격대가 너무 높았다. 위스키는 귀족들이나 선장들의 술을 될 수 있어도 일반 선원들의 술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럼’이었다. 럼은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아서 쉽게 상하지도 않았고,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재료로 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스키처럼 비쌀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럼주는 해적은 물론 일반 상선의 선원들과 해군들까지 즐겨 마시는 뱃사람들의 술이 되었다.
‘캐리비언의 해적’ 처럼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해적들은 언제나 럼주에 취해있는데 이것은 단지 해적들이 거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사실은 해적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당시 해군들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뱃사람들은 해적이든, 해군이든 누구나 항상 취해 있었다는 거다. 그런 까닭에 당시 배에서 선장이 선원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 중 하나가 금주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술을 주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식수를 공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넬슨의 피(Nelson's Blood), 럼주
마커스 레디커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에 보면 "술은 뱃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 붙어있게 해주는 접착제"라는 구절이 있는데, 캐리비언의 해적들과 가장 치열하게 맞선 세력은 당연히 영국 해군이었지만 이들에게도 ‘럼주’는 필수였다. 영국 해군은 오랫동안 럼주를 병사들에게 럼주를 제공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그래도 명색이 군대인데 해적처럼 하루종일 진창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럼주 배급에 대한 규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럼은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 이하 승조원들에게만 지급되었는데(단 20세 이상인 자에 한해서), 하루에 약 0.5파인트(대략 260~280cc)씩 점심과 저녁으로 2번에 걸쳐 배급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양주잔(35cc)으로 환산하면 무려 55도에 달하는 술을 하루에 8잔씩 준 셈이다.
병사들이 늘 술에 취해있으니 규율과 기강이 생명인 해군 고위층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군대 물품을 임자 없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국에도 있었기 때문에 선장이나 당직 사관이 럼주를 빼돌려 팔아먹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선원들은 늘 더 많은 럼주를 원했고, 선장이나 항해사 같은 장교들은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술 배급을 놓고 자주 갈등해야만 했다. 꼭 럼주 배급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갈등은 종종 술로 인해 증폭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선원들에 의한 선상 반란이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선원들이 럼주에 덜 취하도록 하기 위해 에드워드 버논(Admiral Edward Vernon)이란 해군 제독이 머리를 썼다. 그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하도록 했는데, 술에 물을 타니 맛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줄어든 향미를 보충하기 위해 레몬이나 라임 쥬스, 설탕 등을 럼주에 섞어 배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칵테일 ‘핫 그로그(Hot Grog)’의 시작이었다. 이 말의 유래는 버논 제독이 항상 착용하던 방수망토(grogram)에서 따온 것인데, 이 칵테일에서 나온 말이 바로 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 ‘그로기(groggy)’란 말이다.
럼주의 별명 중에 '넬슨의 피(Nelson's Bllod)'란 말이 있는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럼주 통에 담아 영국까지 돌아왔는데 럼주 통을 열어보니 럼주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아호의 수병들이 럼주를 마시고 싶어서 넬슨 제독의 유해가 담겨있는 럼주 통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빨아먹다보니 술이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는(다시 생각해보면 넬슨 제독을 과실주처럼 술 담궈 먹었다는 섬칫한 이야기)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럼주에 대한 영국 해군들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후 점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양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식품용기와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럼주의 효용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유독 영국 해군만큼은 럼주 배급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지난 1970년 7월 31일, 최후의 럼주 배급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선상에서 럼을 식수로 사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참고로 미국 해군은 1862년 9월부터 폐지되었다. 현대 해군은 술과 같은 알코올성 음료를 선상에서 제공하거나 마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해군이 운용하는 장비의 가격대도 엄청나졌지만, 해군이 가진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원 한 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누른 버튼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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