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엔지압(武元甲, Vo Nguyên Giap, 1911.8.25 ~ 2013. 10. 4)
보구엔지압,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인가?
현행 발음 표기대로라면 '보응우옌잡'이 맞다고 하는데, 그냥 입에 밴 대로 보구엔지압이라고 해두자. 그가 지난 10월 4일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를 탁월한 군사전략가라고 말하는데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혁명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를 일러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이런 별명을 좋아했다고도 하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나폴레옹과도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는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퇴시켰던 미하일 쿠투조프와 닮았다.
역사상 차르의 궁전에 깃발을 꽂는데 성공했던 외국 군대는 징기스칸의 몽골군을 제외하곤 없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까지도 그렇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그의 위대한 군대( La Grand Armée)는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러시아의 유럽 동맹국을 공격하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러시아는 1805년과 1807년 두 차례에 걸쳐 나폴레옹에게 크게 패하면서 군대의 10분의 1을 잃어야 했고,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조약을 준수할 의사가 별로 없었고, 나폴레옹 역시 알렉산드르 황제의 러시아를 호시탐탐 넘봤다. 나폴레옹의 넘치는 자만심이 화를 불렀다. 그는 적국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도 잘 드러난다.
"알렉산드르 1세여, 나의 70만 대군이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랐다. 더이상 험한 꼴 보기전에 항복하라!"
당시 나폴레옹을 상대하던 적장은 미하일 쿠투조프였다. 쿠투조프는 예전에 이미 나폴레옹에게 크게 패했던 경험이 있는 장군이었으며 당시 러시아군의 전력은 여러 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에 비해 훈련과 장비면에서 뒤떨어졌다. 그는 일부러 후퇴하는 전략을 택해 나폴레옹에게 텅빈 모스크바를 내준 뒤 곧 불을 질러 파괴했다. 나폴레옹이 할 수 없이 철수하게 되자 쿠투조프는 그가 왔던 서쪽 길목만을 터주었다. 위풍당당하게 러시아를 침공했던 그의 위대한 군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러시아 평원에서 묻히고 말았다. 1814년 3월 알렉산드르 황제는 당당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역사교사를 장군으로 만든, 사람 볼 줄 알았던 호치민과의 만남
보구엔지압을 쿠투조프에 비견하는 것은 물론 여러 면에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 쿠투조프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 장군의 지연작전과 초토화 작전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이런 작전은 황제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법이다. 황제 역시 쿠투조프 장군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매우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지압이 1940년 호치민을 만나러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지압을 만난 호치민은 나이 30도 안 된 지압에게 베트남 공산당 군대를 양성하고 조직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에게 '장군' 칭호를 내렸다. 지압 장군은 군대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언론인, 고등학교 역사교사 출신이었다. 물론 그는 혁명가로서, 역사전공자로서 군대와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 혁명사와 나폴레옹의 군사작전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를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얻게 한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호치민이 사람을 보는 눈이 얼마나 남달랐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구엔지압은 베트남 중부 쾅남다낭성(省)에서 출생했다. 그는 하노이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립됨과 동시에 입당하였으며, 1930년대 말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 가서 호찌민[胡志明]의 지도하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하여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 후, 여러 성(省)에 혁명세력의 근거지를 만들어서 항일(抗日) 게릴라부대를 지도하였다. 1945년 독립과 함께 내무장관이 되었고, 1946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프랑스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해방군 총사령관이 되어,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베트남은 20세기의 30년 전쟁이었다. 한 세대가 흘러가는 동안 5명의 미국 대통령이 인도차이나의 현실을 잘못 인식했고 자신들이 만든 환영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 환영은 처음엔 공포였으나 나중에는 희망으로 변했다. 이러한 공포와 희망은 현실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마침내 부정할 수 없는 악몽이 되어 버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깊은 갈등을 초래했다." - 존 스토이신저
베트남전은 미국과 베트남의 단순한 인내력 대결이었을까?
지압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지압 장군과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는 글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하면서 "지압은 병참술의 대가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것을 넘어선 것에 기인한다. 그의 승리는 그와 호찌민이 승리를 확신한 '버티기' 전략으로 이뤄진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적이라 해도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더라도 감내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의미한다. 호찌민은 프랑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 열명을 죽여라. 우리는 프랑스군 한명을 죽일 것이다. 결국은 당신들이 먼저 지칠 것이다."라고 했고, 이어 "미군은 월맹군과의 전투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으나 전쟁에서 패했다"고 말했다.
"오자병법(吳子兵法)" 도국(圖國)편에 "천하가 싸움에 휩쓸렸을 때(天下戰國) 5번 이긴 자는 화를 면치 못하고(五勝者禍), 4번 이긴 자는 그 폐단으로 약해지고(四勝者弊), 3번 이긴 자는 패권을 잡고(三勝者覇), 2번 이긴 자는 왕이 되며(二勝者王), 단 한번 이긴 자가 황제가 된다(一勝者帝)"란 말이 있다. 실제로 지압 장군의 전술은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식민모국과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강대국을 상대로 인명 손실을 감내하는 지연작전과 소모전의 양상을 띠었다.
케네디를 비롯한 그의 군사고문단들은 베트콩 병사들이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색 파자마'를 입은 베트콩은 가짜군대이며 남베트남이 합법적인 정규군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당시 지역 전문가들이었던 로스토우와 테일러 등은 베트남을 한국과 같다고 보았지만 이들 역시 베트남과 한국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했다. 즉 한국은 어쨌든 군복을 착용한 적군이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 침략한 정통적인 의미의 전쟁을 치른 반면 베트남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사실상 전선이 없는 정글지대의 이점을 이용해 게릴라들이 치르는 정치 투쟁이었다.
실제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우리가 기억하는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전술적으로 막대한 피햬를 입었다. 1968년 전술적으로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던 케산의 미군기지를 향해 수많은 베트콩들이 몰려 들었다. 많은 이들이 이 전투가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던 디엔비엔푸 전투의 재판이 될 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 케산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북베트남군은 케산에서 물러났다. 당시 케산 전투를 지휘했던 론스(David E. Lownds) 대령에게 기자들이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언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나?"라고 묻자, 론스 대령은 자랑스럽게 답했다.
"적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우리가 그곳에서 생생하게 보였주었습니다."
그러나 케산 전투는 곧 들이닥칠 1968년 '구정(테트)공세'의 철저한 위장이었다. 미국과 군부의 시선을 케산에 묶어둔 상황에서 지압 장군은 테트 공세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전력을 다한 테트 공세에서 베트콩은 초기에 잠깐 그들이 원했던 성과를 거두었을 뿐 이후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때 입은 인적, 물적 손실이 너무나 막대했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인적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테트 공세 이후 더이상 전쟁을 지속시킬 수 없었다.
베트남이 그토록 많은 인명 손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까닭, 대의명분
보구엔지압 장군은 미국인 전기작가와의 인터뷰에서 테트 공세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구정공세를 군사적인 목적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우리는 더 넓게 생각했습니다. 구정공세는 군사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동시에 외교적인 활동이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전쟁을 단계적으로 축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건 아주 포괄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군사 전략인 동시에 정치 전략이었습니다. 우리도 적을 섬멸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싸울 의지는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구정 공세의 이유입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지휘했던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베트남전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습니다. 중대 단위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맞붙은 곳에서는 모두 이겼습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도 물론 이겼죠."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이긴 하겠지만 지압 장군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딘 러스크 같은 인물도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면서 마치 이 전쟁이 의지력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평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국의 패배 요인을 분석할 수 없다.
앞서 "오자병법(吳子兵法)" 도국(圖國)편을 이야기했는데, "단 한번 이긴 자가 황제가 된다(一勝者帝)"란 이야기 앞에 오자가 전쟁에 임하는 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강조한 이야기가 있다.
"무릇 국가를 잘 다듬고 군사력을 기르려면 반드시 예를 가르치고, 의를 고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염치를 알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크게는 나아가 싸우기에 충분하고, 작게는 싸워서 지키기에 충분하다. 싸워서 이기기는 쉬워도 이를 지키는 것은 어렵다(吳子曰, 凡制國治軍,必敎之以禮, 勵之以義, 使有恥也. 夫人 有恥, 在大足以戰, 在小足以守矣. 然戰勝易, 守勝難)." 이게 무슨 말일까? 부국강병을 이루고,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내부의 이데올로기, 동양적으로 말해서 대의명분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의 호치민을 마오쩌둥의 꼭두각시 정도로 여겼지만, 베트남과 중국은 미국이 오기 전부터 오랜 세월 치고박은 앙숙이었으며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이었다. 그는 공산세계에서는 마오쩌둥보다 더 원로 공산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정의를 지닌 인물이었다. 데이빗 할버스탐은 그를 일러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했다.
미국인들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자신들이 미지의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 결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대학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역학 연구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만약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이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에 해당한다. 또 막대한 군비와 인명 손실과 국론분열을 경험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지 않은 전쟁이 어디에 있겠는가만 베트남전쟁은 그 자체가 거대한 햄버거힐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미국이 디엔비엔푸 이후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은 공산화되었을까?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더 일찍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는 분명 모스크바나 베이징과는 다른 독립적이고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불타는 제3의 공산주의였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 정도 공산주의였다면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처럼 미국도 수용할 만한 수준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잠시 유예하기 위해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과 300만 명 이상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를 사용하고도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을 수 없었고, 내버려두었더라면 공산화되지 않았을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의 도미노를 건드려 버렸다.
보구엔지압 장군은 호치민 사후 도입된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 전쟁 기간 동안의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고, 오랫동안 침잠해 있어야만 했다. 지난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부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취임하였고, 1976~1982년 베트남공산당 정치국원을 지냈으며 1981~1991년 다시 부총리를 지냈다. 그리고 2013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명령으로 죽어야만 했던 수많은 동지들과 젊은이들이 지금쯤 그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을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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