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선우 - 목포항 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 시인 김선우. 이름만 들어선 시인이 성별(性別)이 쉽게 구분되지 않지만, 그녀의 .. 더보기 김선우 - 낙화, 첫사랑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 더보기 김선우 - 시체놀이 시체놀이 -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 더보기 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 김선우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 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 더보기 김선우 - 사골국 끓이는 저녁 사골국 끓이는 저녁 - 김선우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 2007년 봄호 *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는 내 연애의 대상이었다. 막노동판을 떠돌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 그 목에서는 이차돈의 흰 젖 같은 피 대신 시가 나..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