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
시인 김선우. 이름만 들어선 시인이 성별(性別)이 쉽게 구분되지 않지만, 그녀의 시를 한 구절만 읽어봐도 시인이 여성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문학에 있어서 ‘페미니떼'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의 시에서 여성성의 시어를 느끼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마치 선언하듯 말한다.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고, 세상엔 무수한 막차가 있다. 나는 막차 떠난 버스 정류장, 막차 떠난 지하철 역, 막차 떠난 기차역 벤치에서 노숙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목포항에서, 그것도 막배가 떠난 목포항에 있어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막'이란 어휘가 주는 그 막막함만큼은 우리 누구에게도 낯선 경험이 아니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그 막막한 느낌만큼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안쓰럽고, 원초적인 상처가 또 있을까.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은 현관문에 쪼그려 앉은 아이의 막막함으로 시인은 우리에게 막배 떠난 목포항이란 구체적 공간 안으로 불러들인다.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는 다소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호명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지명, 목포항으로 우리를 불러들인 뒤 마치 카메라가 서서히 원경으로부터 근경으로 이동해가듯 “막배 떠난 항구”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항구의 스산함에 연이어 우리는 시인이 이끄는 대로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에게 시선이 멈춘다. 시인은 다시 필경 노파의 가랑이께 어딘가에 놓인 복숭아에 우리를 이끌고, 다시 복숭아의 짓무른 과육을 클로즈업 해 보여준다.
쪼그려 앉은 노파와 짓무른 복숭아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라도 숨겨줄 수 있을 것 같은 할머니의 폭 넓은 치마와 그 치마 속에 숨겨진, 우리 모두를 탄생시켜주었을 비릿한 자궁냄새를 맡을 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의 원초적 발상지인 바다(목포항) ‘떠나간 막배’의 심상(image)은 양수로 가득한 자궁의 심상과 일치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가느다란 탯줄을 끌고 세상으로 나간다. 우리는 어머니 가랑이 사이에 놓인 항구를 탯줄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를 일으키며 떠나는 막배.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넉넉하고 푸근한 안뜰은 그러나 그냥 생긴 것은 아니라서,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은 비릿하다.
그 상처들, 푸른 생애의 안뜰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생겨났다. 시인은 비로소 말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시인은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떠나간 자식일 수도 있는,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닐 수 있는, 그럼으로 그 모든 것일 수 있는 “떠나간 막배”를 향해 섣불리 아파하며 돌아오라고 외치지 않는다. 시인은 떠나간 막배를 부르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대신 결코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시인으로 하여금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하게 만든 것은 떠나간 막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쪼그려 앉은 노파의 짓무른 복숭아 때문이다. 시인은 그제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며 심상의 원근법을 통해 원경에서 근경으로 그리고 다시 심경(心景)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순간 우리는 시인의 거대한 흡인력을 통해 "떠나간 막배"가 되어 그녀의 몸속으로 그녀가 펼쳐 논 거대한 사랑의 결계로 들어간다. 아니, 빨려든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희망하는 바다 위의 막배는 항구를 떠날 수는 있어도 결코 바다를 벗어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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